나의 이야기

우울한 계절의 기억들

안데스의꿈 2022. 6. 8. 16:17

1) 2019년 3월 9일 수유리에 갔다. 90년대 중반 이후 20여년만이었던 것 같다.

4.19탑 근처 어느 식당에서 생선구이로 점심식사를 했다. 식사 후 형은 굳이 10만원을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아마 일부러 올라오게 했으니 경비에 쓰라는 의미같았다.  다시 집으로 이동해서 1층의 서재와 몇몇 보수가 필요한 부분에 대하여 기술적 관점에서 조언했다.

 

2) 2019년 12월 28일 점심약속을 하고 수유리를 방문했다. 형수님은 홍섭이네 부모 부부를 초청했다고 말했다. 홍섭이는 승일이보다 두살쯤 위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승일이가 어릴때 이웃에 살면서 형제간처럼 친하게 지내다 보니 부모들끼리도 이웃사촌으로 지냈던 분들로 나에게도 반가운 분들이었다. 그분들을 모시고 즐거운 점심식사를 했다. 장소는 역시 4.19탑 근처의 어느 식당으로 메뉴는 회종류였던 것 같다.

 

3) 2021년 5월 14일 근무지를 구례로 옮겼다. 짐을 풀고 현장 상황을 파악하느라 바쁘게 며칠을 보내고 서울의 몇몇 친구들에게 근무지 이동을 알렸다. 그중 한 친구가 5월 27일 카톡을 보냈다. 5월 29일 토요일 저녁 초등학교 동창 몇명이  용인에서 친구가 담은 산삼주를 먹기로 했으니 참석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잠시 생각하다가 여기(구례)서 일찍 출발하여 수유리로 직행하여 형과 점심식사를 하고 용인으로 출발하면 적절할 듯 해서 형에게 전화를 했으나 통화가 안되었다. 강의때문인 것 같아서 형수님과 통화 했는데 잠깐일 줄 알았던 통화가 길어졌다. 형의 건강이 악화되어 치료중이고, 치료 프로그램에 맞춰 생활하므로 만남이 어렵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형 본인이 모든 사람에게 발병사실을 알리지 않기를 원한다는 말씀을 듣고 혼자만 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4)2021년 8월 어느날 점심무렵에 형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매우 밝은 목소리였다. 형은 그 전해 말 발병사실과 치료 경과를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현재의 치료결과가 최상이라고 말했다. 내 기억에 대면과 통화를 통틀어 형이 나에게 그처럼 장시간 말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통화시간이 30분은 분명히 넘었을 것으로 기억된다. 병세 호전 소식에 나도 무척 상쾌한 점심식사를 했다.

 

5) 2021년 11월 6일 수유리에 들렸다. 식당에서 닭요리를 주문해서 좀 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그때만 해도 형의 건강이 회복, 유지된다는 희망을 갖고 있을때여서 편안한 대화를 나눈 시간이었다. 돌이켜 보면 형과의 마지막 식사였다.

 

6) 2022년 1월 25일 12시에 점심식사를 위해 사무실을 나섰다. 식사중에 카톡이 울렸으나 확인하지 않았다.

식사 후에는 카톡 확인을 잊었다. 사무실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며 인터넷 이곳 저곳을 뒤적이며 대선관련 이슈를 탐색할때 형의 전화가 왔다. 최근에 발표 한 논문이 12편에 이르러 단행본으로 정리한 원고를 pdf 파일로 만들어 카톡으로 보냈으니 시간 되면 읽어보라고 했다. 이어 이재명에 관해 여러가지 대화를 나눴다. 형은 유년기 이재명의 세세한 과거사까지는 알지 못했다.(어찌 보면 당연하다) 

나는 한번 흥미가 생긴 인물이나 사건 혹은 분야를 끝까지 파는 경향이 있어(가끔 그럴 뿐이다) 정확하게 파악한 이재명의 유년기중 그가 공부했던 환경과 기간에 대하여 말했다. <이재명은 중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를 위해 3개월을 그것도 공장을 한달만 쉬고 공부하여 통과했고, 고교 졸업자격 검정고시 역시 공장을 두달만 쉬며 3개월 공부하며 통과했다(1980년). 중고생 과외지도를 하며 대학공부를 하려 했는데 1980년 7월 30일 과외 금지조치로 포기하고 다시 오리엔트 공장을 다니다가 1981년 대입 본고사가 없어지고 예비고사 점수로만 입학하되 고득점 입학자에 대한 장학제도를 확충하는 대입제도 변경으로 다시 대학입시공부 시작, 1981년 3월 공장을 다니며 학원수강을 병행했다. 공장 퇴근후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학원 수강하고 새벽 4시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하다가 집에 가서 잠깐 눈 붙이고 다시 공장에 출근하는 생활을 하는 도중 공장내 폭력으로 갈비뼈 골절, 두달만에 학원 포기, 1981년 7월 공장 퇴직하고 학원 재등록하여 이후 4개월간 공부에만 전념하여 예비고사에서 285점 득점>, 이런 연유로 이재명은 천재이고, 자기중심적 성향이 강한 것이 천재들의 공통점인데 이재명은 돌연변이로서 공익지향적 천재라고 말했다. 

그러자 형은 <그렇구나! 그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구나.> 대략 이런 말을 마지막으로 통화를 끝냈다. 

하지만 형이 마지막에 언급한 <우리>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나보다.

1월 26일 18시 35분 형이 전화를 했다.  대개의 경우 어릴때 불우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그 반작용으로 배금주의적이거나 권력지향적 성향을 띠는 경향있는데 이재명은 그것도 아니고 천재들이 갖는 자기중심적 성향도 아닌, 공익지향적인 돌연변이형 천재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형이 <너도 대단해> 라고 말했다. 

 

7) 1월 27일 형이 페북에 가칭<사회사로의 초대>를 탈고했음을 알렸다.

 

8) 2월 3일 19시 31분 형이 대선후보 1차 선관위 TV토론을 잘 보고 개요를 알려달라고 전화를 해왔다. 형으로부터 걸려온 마지막 전화였다. 토론이 끝나고 형에게 두차례 카톡을 했다.

 

9) 2월 4일 어제 보낸 카톡에 대한 형의 답이 왔다. 형이 보낸 마지막 카톡이었다.

형이 페북에 작별의 말을 남기고 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