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 바르게 보기

마키아벨리 다시 읽기 15

안데스의꿈 2016. 2. 1. 12:04

베네치아의 신화 : 혼합 정체와 협소한 정부.


"베네치아의 신화"(II Nito di Venezia)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1117년 교황 알렉산더 3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의 평화조약을 중제한 이후, 베네치아는 로마 교회와 신성로마제국과 함께 이탈리아 반도를 좌우하는 열강중 하나가 되었다. 최초에는 이탈리아와 발칸반도 사이(아드리아해, 옮긴이 생각)의 해적들을 제압하려고 몇몇 도시들을 장악한 것이 팽창의 시작이었지만, 이후 그리이스 지역과 크레타섬까지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자 베네치아는 무시하지 못할 나라로 성장했다.

1204년 4차 십자군 원정 때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면서 베네치아는 사실상 제국으로 거듭났고, 1380년 해상무역의 경쟁도시였던 제노아까지 제압하면서 명실상부한 지중해의 패권국가가 되었다. 16세기 초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주변 열강을 불러들여 베네치아를 상대로 동맹을 결성했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밀과 소금을 독점해서 얻은 베네치아의 힘은 이탈리아 본토에서도 가히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베네치아의 신화"는 단순히 물리적인 힘의 팽창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1797년 나폴레옹에게 항복할 때까지, 베네치아는 문화적으로도 유럽에서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무었보다 15세기 후반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급성장한 인쇄문화가 유럽을 선도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탁월한 인쇄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작권과 출판의 자유를 동시에 보장하는 선진적인 제도, 그리고 삽화와 도판을 만들 수 있는 인력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키아벨리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이 새 책을 구입하기 위해 베네치아에 사람을 보내는 일이 허다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지식인들의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 일찍이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베네치아를 "자유, 평등, 그리고 정의의 고향"이라고 말했고, 피렌체 사람들은 베네치아라고 하면 "지혜로운 솔로몬의 기억"(la memoria del savio Salomone)을 떠올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는 베네치아와 피렌체 지식인들이 재생산하는 "베네치아의 신화"에 노골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한다. <강론> 1권 5장에서 밝히듯, 그는 베네치아가 소수의 사람들만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협소한 정부"(governo stretto)를 지향했다는 것, 그리고 문호를 개방하지 않고 시민을 무장시키는 데 인색해서 자멸할 수 밖에 없는 제국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실 베네치아는 당시 피렌체 지식인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가능한 최선의 정체"로 간주된 "혼합정체"(governo misto)의 실질적 모델로 간주되었다. 군주정, 귀족정, 민주정이 갖고 있는 장점을 고루 갖춘 정치체제로, 그리고 실제로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지속된 안정적인 정치체제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이주민을 받아들이지 않는 베네치아의 폐쇄적인 사회구조, 그리고 처음 도시를 세운 귀족집단의 자제들이 계속 독점하고 있는 베네치아의 정치공간을 혐오했다. 특히 25세 이상의 귀족 자제들로만 구성된 "대평의회"(I Maggior Consiglio)가 어떻게 민주정적 요소인지 그는 의아해했다.

마키아벨리에게 베네치아는 "조용한 공화정"이 아니라 "죽은 공화정"이었던 것이다. 그에게 "솔로몬의 지혜"를 상속받았다는 베네치아의 종교적 허세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기독교 공화정"이라는 구호는 비단 베네치아만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면 그는 "베네치아의 신화"가 전달하는 "협소한 정부"를 통한 "정치적 안정"이라는 선전을 결코 좌시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베네치아는 "오래 존속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 무엇도 배울 것이 없는 정치체제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강론> 1권 2장에서 보듯, 마키아벨리는 베네치아가 오랬동안 살아남은 이유조차도 섬나라라는 지정학적 요건과, 다른 나라들이 배를 만들지 못하는 상황에서 찾고 있었다. 한마디로 베네치아는 운이 좋았을 뿐, 조그만 도시 테베(Thebe)의 반란에 무너져버린 스파르타와 같은 운명에처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P.S 위 글은 2013년 6월 22일 경향신문 23면 <마키아벨리 다시 읽기>시리즈 5회의 일부로 필자는 <곽준혁 숭실대 가치와 윤리 연구소장>님 입니다.


마키아벨리를 보면, 시공을 초월하는 혜안에 항상 감탄한다.

그가 희대의 천재인 탓도 있지만, 그 자신이 원래 귀족도 아니고 학자도 아닌, 직업관료로 생애의 절정기(30대-40대 초)를 보내고 타의로 은거한 탓에 관념론에 치우친 담론에 매몰되곤하는 지식인들과 전혀 다른, "현실적 사유"를 통해 현상의 본질을 투시하는 직관력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