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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다시 읽기 20

안데스의꿈 2016. 2. 6. 00:19

7.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1498년 5월 23일 아침, 수도사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와 그를 따르던 두명의 도미니코회 수도사들이 피렌체의 시뇨리아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이들의 죽음과 함께, 지난 4년동안 피렌체를 사로잡았던 "새로운 예루살렘"(Nuova Gierusalemme)이라는 꿈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미 4월 19일 사보나롤라의 재판이 있었던 날, 루카 란두치(Luca Landucci)는 자신의 일기에 "그토록 고생해서 쌓아올린 구조물이 무너져 내린 비통한 날"이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어떻게 새로운 예루살렘과 같은 피렌체인의 꿈이 한갓 거짓말(una sola bugia)위에 세워질 수 있었느냐"고 한탄했다.

아마도 사보나롤라가 화형장의 재가 되어버린 날 피렌체 시민이면 누구나 이렇게 되물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사보나롤라가 사보나롤라가 등장한 시점부터 몰락까지 그의 예언을 거짓말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다만 <강론> 1권 11장에서 보듯, 마키아벨리는 애당초 사보나롤라가 "신과 이야기를 했다는 것"(che parlava con Dio)에 대해 판단 하고싶지 않았다.

로마의 종교를 만든 누마(Numa)처럼 요정과 이야기를 했다고 거짓말 하는 것 따위는 필요하다면 할 수 있는 기만에 불과했던 것이다. 대신 그가 대신 그가 주목한 것들은 정치적인 문제들이었다. 시민들의 정의감을 "시민적 자유"와 "공동체의 존속"과는 전혀 상관 없는 불필요한 목적에 분출시켜 완전히 소진해버린 것, 그리고 스스로가 제정한 법을 위반함으로써 자기의 통치를 "정치적 권위"의 행사가 아니라 "물리적 힘"의 행사로 인식시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마키아벨리는 단 한번도 사보나롤라의 예언을 믿은 피렌체 시민을 비난하지 않았다. 무식하다거나, 전박하다는 비난도, 이렇듯 한심할 수 있느냐는 한탄도 하지 않았다. "허영의 소각"(Falo delle Vanita)과 같은 불필요한 집단행동, 그리고 방향도 없이 휘둘러대던 증오의 주먹질은 전적으로 사보나롤라와 그를 따르던 정치 지도자들의 잘못이다. 정치는 결국 "파당적" 이익의 관철일 뿐이라는 편견을 심어주고, "법"이 아니라 "힘"이 해결책이라는 인식을 시민들에게 각인시킨 당연한 결과라는 것이다. 어쩌면 마키아벨리는 사보나롤라를 무장했더라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예언자로 간주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P.S 피렌체사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바로 사보나롤라시대 피렌체와 오늘의 우리사회가 너무도 닮았다는 느낌이 들면서 부터이다.

      사보나롤라와 우리 지도자. 그리고 "신의 광기"와 오늘의 "종북놀이의 광기"를 대입하면 그 유사함에 몸이 떨릴 정도이다.

      "영웅사관"에 경도된 시오노 나나미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녀가 쓴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를 보면 사보나롤라 시대의 피렌체가 매우 잘 묘사되어 있

      다. (옮긴이 생각)


<사보나롤라의 등장 : 분노와 희망의 협주곡>

사보나롤라의 고향은 볼로냐에서 조금 떨어진 이탈리아 동부의 페라라다.이곳에서 사보나롤라는 일곱명의 아이들 중 셌째로 태어났다.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할아버지를 따라 의사가 되려는 마음을 먹은 적도 있지만, 뛰어난 인문학적 소양때문인지 성서연구에 몰입해 결국 도미니코회 수도사가 되었고, 토마스 아퀴나스에 정통한 신학자로서의 길을 걷는다. 이런 그가 피렌체에 첫 발을 디딘 때는 산마르코 수도원의 강사가 된 1482년이다.

처음 그의 설교와 강의는 페라라 사투리와 학자적 언변때문에 크게 인기를 끌지 못했다. 다만 1486년 사순절 설교에서 보듯, 이때 이미 그의 신앙고백은 "계시적 환상"으로 가득 차 있었고, 로마 교회의 "진정한 회개"에 대한 그의 요구는 도발적인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1487년에 신학강의를 하러 볼로냐로 돌아갔던 사보나롤라를 다시 피렌체로 끌어들인 것은 공교롭게도 로렌초 메디치였다.

1490년 로렌초가 사보나롤라를 피렌체로 데려왔을때, 그는 강단을 떠나 작은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대중 설교를 하고 있을 무렵이었고, 이를 통해 쌓은 명성이 로렌초의 보호를 받고 있던 철학자 피코 미란돌라(Pico della Mirandola)의 귀에까지 들어간 시점이었다.

피코는 사보나롤라의 로마 교회에 대한 비판을 높이 평가했고, 로렌초에게 사보나롤라를 통해 메디치 가문의 신앙심을 과시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파코의 조언과는 달리, 사보나롤라는 산마르코 수도원장으로 선출된 그 이듬해부터 로마 교회의 부패에 대한 비난과 함께 메디치 일가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독설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1492년 로렌초가 죽기 전부터 사보나롤라의 설교는 많은 청중들을 몰고 다녔다. 그의 설교를 들으려는 청중이 너무 많아서 산마르코 성당에서 산타마리아 대성당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을 정도였다. 또한 이탈리아와 피렌체의 부패를 싯기 위한 "신의 칼"(la Spada di Dio)이 곧 내려올 것이라는 경고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고, 로렌초의 뒤를 이은 피에로 메디치(Piero diLorenzo de' Medici)의 무능이 사보나롤라의 메디치 가문에 대한 비난에 점차 큰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1494년 8월 프랑스 샤를 8세가 이탈리아로 쳐들어왔을때, 많은 시민들이 샤보나롤라의 예언이 적중했다고 믿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단 말이다. <계속>


P.S 위 글은 2013년 7월 6일 경향신문 23면 <마키아벨리 다시 읽기> 시리즈 7회 도입부이며 필자는 <곽준혁 숭실대 가치와 윤리 연구소장>님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