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 바르게 보기

마키아벨리 다시 읽기 22

안데스의꿈 2016. 2. 10. 11:32

8. 마키아벨리와 비(非)지배.


<강론> 1권 47장에서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가문을 축출한 바로 그 시점부터 피렌체가 "심각한 방종"(licenza ambiziosa)에 빠지게 되었다고 개탄한다.

글자 그대로 옮기면, 그는 분명 피렌체가 "야망이 초래한 무질서"상태에 처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야망"이나 "욕망"이 "무질서"와 "방종"을 가져왔다는 말을 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그가 지적하고자 한 것은 "대중정치인들"(popolari)의 무능력이다.광장에서는 그토록 목소리를 높여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더니, 권력을 잡은 뒤에는 모든 문제에 침묵해버린 대중정치인의 무책임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그는 바로 이들이 피렌체 시민들을 노예상태에 빠뜨렸고, 바로 이들이 "정치"에 환멸을 불러일으켰다고 한탄한다.

어쩌면 지금 지구촌 곳곳이 마키아벨리의 지적에 귀를 기울여야 할지도 모른다. 메디치 가문의 축출 이후에 닥친 위기에 갈피를 못잡던 피렌체와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민주주의 보편화시대"의 일상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직면해 스스로를 관리하기에 급급항 생활 속에서 점차 개인화되어 가는 시민, 무한경쟁과 극도의 긴장 속에서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에게 절망만 안겨주는 시장, 사건마다 즉흥적으로 형성되는 여론이 시민적 열정을 제도의 개혁이 아닌 다른 목적에 소진시켜버리는 광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이념적 도덕률만을 고집하며 회랑과 광장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정치인, 이 모든 것이 피렌체를 개혁하고자 했던 마키아벨리의 고민과 무관하지 않다.

물론 마키아벨리의 시대가 그러했듯이, 새로운 제도에 대한 열망은정치에 대한 총체적 불신과 맞물려 "정치적 신중함"이 작용할 작은 공간마저도 허락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리고 페리클레스가 죽은 이후 아테네 민주주의가 그러했듯이, 시민들이 목도하는 것은 단지 무능력한 정치인들이 만들어내는절망적"대치"(deinon)일 수도 있다.

마키아벨리는 바로 이런 절망의 시대에 도전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에게서 셰익스피어에 등장하는 티몬(Timon)의 독백을 읽을 수 없다.

그의 글에는 정치에 대한 불신이나 인간에 대한 실망이 없는 것이다.

대신 인간의 흠결을 받아들이고, 다양한 의견과 인간적 욕망이 부딪쳐 만들어내는 정치의 본질을 이해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한명의 철학자를 만나게 된다. 악마의 굴레를 재치로 벗어난 <벨파고르>의 농부 잔마테오처럼,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마키아벨리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계속>


P.S 위 글은 2013년 7월 13일 경향신문 23면 <마키아벨리 다시 읽기>시리즈 8회의 도입부이며 필자는 <곽준혁 숭실대 가치와 윤리 연구소장>님 입니다.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모든 정치,철학적 사유들을 사상적으로 집대성한 바는 없어 일목요연하진 않지만,

"정치적,사회적 존재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그의 어록들이 내포하는 일관된 가치는 비록 우리가 의식하지 않지만, 우주의 암흑에너지처럼 지금도 우리 곁에 존재하며 사회현상에 대하여 고민하는 우리들에게 값진 자양분을 공급한다고 믿는다.(그는 사실 스스로를 학자이기 보다 핀렌체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행동주의자로 자리매김 했다고 보여진다)

이를테면 2차세계대전때 인간에 의해 자행된 야만적 대량학살에 대한 철학적 고민으로 평생을 보낸 사르트르도 어느 면에서 마키아벨리와 별로 다르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