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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다시 읽기 23

안데스의꿈 2016. 2. 11. 14:43

< "다수"가 비지배를 꿈꿀때 : 시민적 자유와 시민적 품위>


마키아벨리는 공화정의 "다수"가 비지배를 꿈꿀때 시민적 자유와 시민적 품위가 함께 보장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한다.

여기에는 개개인은 한 사회에서 특정 역할이 있다는 "유기체론"도, 자연은 몇몇 사람들이 무리 중에서 두각을 두각을 나타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는 "자연귀족"론도 없다. 다만 냉혹하리만큼 차분한 정치적 현실주의, 그리고 욕망과 실수가 버무려진 인간사회에 대한 통찰력만이 번뚝일 뿐이다.

그리고 "다수"가 정치에 참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지배받지 않고자 하는 것"이어야 하고, "다수"가 지배를 꿈꿀 때에는 "다수"가 이미 "소수"의 선동과 야망에 사로잡혔을 가능성이 크다는 관찰이 내재되었을 뿐이다.(오늘의 우리 사회가 딱 들어맞는 본보기죠. 오싹할 만큼. : 옮긴이 생각)

특히 <강론> 1권에서 마키아벨리는 "다수"가 지배하려 할때 건강했던 로마 공화정조차도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고 거듭 경고한다.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일관되게 매 "7"로 끝나는 장에서 이런 충고가 반복된다. 7장에서는 한 사람에 대한 시민들의 적개심, 17장에서는 참주에 저항한 인민의 영웅, 27장에서는 인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친 용병대장, 37장에서는 로마 공화정을 구하려다 몰락을 재촉한 로마 공화정의 그라쿠스 형제, 47장에서는 대중정치인, 57장에서는 "대장"(capa)이 없는 무력한 군중, 이 모든 사례는 "다수"의 정치가 어떻게 성공했고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보여준다.

행운의 숫자로 받아들여졌던 "7", 여기에 그는 "다수"의 실패를 막을 지혜를 숨겨놓은 것이다.

유독 마키아밸리가 냉정함을 잃은 곳이 있다. 바로 로마 공화정의 그라쿠스 형제에 대한 이야기다. <강론>을 헌정한 두 유력가문의 젊은이들에게 조언하듯, 1권 37장의 구절들은 정의감에 불탄 젊은이들의 실패에 대한 안타까움이 흠뻑 배어 있다. 우선 그는 당시 지식인들과는 달리 그라쿠스 형제들이 가졌던 문제의식에 아낌 없는 칭찬을 보낸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장병들에게 닥친 가난, 법을 어기면서까지 공유지를 차지한 부자들의 만용, 그리고 노예로 전락한 빈민들의 설움에 분노한 두 젊은이의 정의감을 높이 평가한다.(요즘 우리 사회에선 이런 사람도 종북이죠. 아니면 포플리즘에 경도된 용공이든가. 옮긴이 생각) 그러나 그라쿠스 형제의 실패를 언급할 때, 그들이 인민에게 심어준 잘못된 신념에 대해 말할 때, 그는 눈가에 맺힌 이슬을 숨기지 못한다. "지배"를 통해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시민들이 더 "강한" 참주를 참주를 찾는다는 사실을 왜 몰랐냐고 통탄하는 것이다.("급진"과 "극단"은 또 다른 "급진"과 "극단"을 낳는다는 진리를 통찰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옮긴이 생각)

일면 마키아벨리의 그라쿠스 형제에 대한 평가가 그가 실현하려던 "소란스러운 공화정"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면밀하게 살펴보면, "다수"의 실패에 대한 한탄과 "갈등"의 순기능에 대한 확신은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에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비지배를 위한 집단행동에 대해서 만큼은 그 정도가 지나친 경우에도 거리낌 없는 찬사를 보내기 때문이다. 설사 인민의 비지배를 위한 집단행동이 소요로 귀결되더라도, 그는 그 이유를 인민의무모함보다 귀족의 오만함으로 돌린다.(이것이야 말로 현대 민주국가의 존립 원리죠. 지도층이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으로 독재를 행할때 국민은 위임해준 권력을 회수는 것이 정당하다는 그 말이죠. 우리의 4.19나 87년 6월 항쟁처럼. 옮긴이 생각) <강론 1권 5장에서 보듯, 귀족의 횡포와 거만함이 지배해서라도 자유롭고자 하는 열망을 인민에게 불러일으킨다고 말하는 것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마키아벨리는 "소수"에게 무엇보다 "비지배"를 위해 헌신해야 한자고 주문한다.(지도층은 "공인의식"이 투철해야 한다는 말이죠. 옮긴이 생각) "비지배"를 위해서라면 <강론> 1권 47장의 파쿠비우스(Pacuvius Calavus)처럼 파당적 이익도 과감하게 버릴 것을 주문한다.(우리에겐 먼 이야기죠. 옮긴이 생각) 그의 해석을 따르면, 카푸아의 파쿠비우스는 안으로는 혁명의 기운이 만연하고 밖으로는 한니발의 침략이 임박했음을 감지한 신중한 지도자이며, 귀족과 인민의 첨예한 갈등을 제도적 합의로 귀결시킨 탁월한 지도자다. 특히 귀족들에게는 그들의 오만함이 불러올 위험이 무엇인지를 직시하도록 강제하고, 인민들에게는 귀족들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받아들이도록 한 사실을 부각시킨다. 여기에 파쿠비우스가 "기만"으로 권력을 잡았다는 역사가들의 평가는 언급되지 않는다. 대신 인민이 스스로의 "비지배"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설득해낸 지도자만 있을 뿐이다.

주지하다시피, 마키아벨리는 정치를 "파당적 이익"과 "개인적 야망"의 실현을 위해 싸우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권력을 잡고자 하는 "소수"에게 "비지배"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파당적 이익을 넘어서야 한다한다고 가르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소수"가 아니라 "다수"의 의사로부터 출발하는 태도, 시민들이 설득될 수 있다는 확신, 그리고 "설득"을 통해 가능한 최선을 획득해 나갈 수 있는 믿음이 지도자에게 필요하다는 점을 부단히 가르쳤던 것이다.(이게 오백년 전에 살았던 그의 생각이었다. 옮긴이 생각)

그리고 부패한 공화정의 개혁을 위한 "제왕적 권력"(podesta regia)만큼이나, "적절한 시점"에 대중을 설득할 수 있는 "영민함"(astuzia)이 지도자에게 필요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한가지였다. 시민적 자유를 상실하면, "다수" 뿐만 아니라 "소수"조차도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나락만이기다리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솔직히 권력층 뿐 아니라 대기업에도 해당 됩니다. 서민이 빈곤층이 되고, 중산층이 서민화 되어 "유효수요"가 고갈되면 기업이 생산한 상품의 "소비"가 감소하여 시장 메커니즘이 붕괴되는 것도 같은 원리다. 줄여 말하면 초식동물이 사라지면 육식동물도 사라지는 거디. 옮긴이 생각) <계속>


P.S 위 글은 2013년 7월 13일 경향신문 23면 <마키아벨리 다시 읽기>시리즈 8회의 중간부로 필자는 <곽준혁 숭실대 가치와 윤리 연구소장>님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