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 바르게 보기

마키아벨리 다시 읽기 24

안데스의꿈 2016. 2. 11. 22:55

<마키아벨리의 죽음 : "내 영혼보다 조국"이라던 애국자>


1527년 6월, 마키아벨리는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다. 수십일 전만 해도 교황 클레멘스 7세가 카를 5세의 군대에 굴복하자 복원된 공화정에서 그는 마지막 꿈을 펼치고자 했다. 그러던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는 사보나롤라를 따르던 공화파 인사들이 그에게 붙인 "메디치가의 하수인"이라는 평판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1527년 4월 그가 친구인 베토리(Vetori)에게 보낸 편지는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나의 조국(patria)을 내 영혼(anima)보다 사랑하네. 내 육십 평생의 경험으로 자네에게 말하네만, 지금보다 더 어려운 상황들(articuli)은 없었네.

평화는 필요하지만 전쟁을 포기할 순 없고, 평화든 전쟁이든 어떤 것도 잘할 수 없는 군주를 우리가 모시고 있지 않은가"라는 말 속에서, 바로 그 "군주"가 클레멘스 7세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메디치가의 하수인"이 아니라(교황 클레멘스 7세는 메디치가의 직계임. 옮긴이) "피렌체의 애국자"의 절규를 읽게 되는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이 편지를 쓴 대, 피렌체는 이미 시민적 자유를 회복한다 하더라도 그 자유를 지킬 수 없는 무능한 "대중정치인"들의 세상이었다.

그리고 클레멘스 7세의 거듭된 실수로 그가 사실상 지배하던 피렌체도 위기에 봉착한 상황이었다. 이때 라구사(Ragusa)의 서기장직도, 용병대장 콜론나(Prospero Colonna)의 고문(이 당시 유럽의 용병대는 청나라 말기의 "군벌" 정도의 의미 이상이며 실제 당시 유럽의 강대국인 스페인,프랑스 등의 군대도 대규모 용병대와의 계약으로 구성되었음. 옮긴이)직도 마다했던 마키아벨리가 나섰던 것이다.

보잘것 없는 직책이지만 클레멘스 7세의 요청을 받아들였던 것도 조국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그를 죽음으로 이끈 것은 어쩌면 공화파의 냉대가 아니라 회복된 공화정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낙심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자신이 자주 사용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nondimanco)라는 말처럼, 그는 죽기까지 자유로운 시민들이 만들어갈 정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끝>


P.S 위 글은 2013년 7월 13일 경향신문 23면 <마키아벨리 다시 읽기>시리즈의 끝 부분이며 필자는 <곽준혁 숭실대 가치와 윤리 연구소장>님 입니다.


르네상스의 실체는(역사적 배경과 사회적 영향은 논외로 치고) 15-16세기 피렌체에서 우후죽순처럼 출현한 천재 예술가들에 의한 탐미적 예술창작활동기를 말한다고 볼 수 있으며, 마키아벨리는 그 중 희귀한 인문학적 천재였다. 그가 죽은 뒤 3년 후인 1530년 <피렌체공화국>은 멸망하고 메디치가의 전제정치(토스카나 대공령)가 확립 됨으로서 르네상스는 종말을 맞이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 이유는 "천재"를 "자유로운 창의력이 극대화된 인간"이라 정의할때 전제정치하에서(혹은 획일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인간의 자유로운 창의력"을 기대할 수 없다는 건 고금의 역사적 교훈이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