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논리적 단상

믿을 것은 오직 <건강한 시민정신>

안데스의꿈 2016. 10. 27. 15:05

요 이삼일간 터져나오는 뉴우스에 따른 어지러움은 누구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양식 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예측 가능했던 범위의 일이지만 그 정도가 상식의 범위를 한참 넘어서는 이 상황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당연히 분노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분노 이전에 깊은 자괴감에 빠지는 것은 나만의 경우가 아닐 것이며 이것은 역시 비정상의 정도가 우리 상식의 범위를 한참 벗어난 탓일 것이다.


어릴적부터 좀 경솔하고 성급한 기질을 가졌다. 사안을 접하면 즉시 판단부터 하고 나서 그 판단이 맞는지를 확인하는 습관(솔직히 확인도 안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이 몸에 배어버렸다.

지인들은 내가 바둑을 접한 뒤 상식 밖의 과정과 속도로 속칭 <고수>의 경지에 도달한 것은 내가 바둑에 천부의 자질이 있었던 탓이라고들 말하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애는 재능이라기 보다 앞에서 말한 <성급한 판단>습관 덕분이 아닐까 한다.

내가 보기에 인간은 누구나 <경험하지 않은 일>도 스스로의 사고능력으로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나아가 사고과정을 생략하고도 경험하지 않은 일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물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는 이것을 보통 직관이라고 한다. 얼핏 보기에 직관은 사고과정이 생략된다는 의미로 인식할 수 있지만 그건 아니다. 머리속에서 여러가지 사고의 조각들을 만지작거리며 망설이는 과정을 생략할 뿐이다.(그로 인한 오류가 더 많음은 물론이다). 어떻든 나는 그것에 익숙하다.


2011년쯤인가 박근혜가 서강대에서 강연을 했던 모양이다. 물론 그 강연을 듣거나 그 내용을 찾아서 들을 만큼 나에게 그녀가 매력적 존재는 아니었다.

다만 어느 가십기사에서 그녀가 했던 썰렁한 농당을 접했다.

박근혜 : 국회의원 뽑기와 코털 뽑기의 공통점은?

청 중  : .....?

박근혜 :둘 다 조심해서 뽑아야 합니다.

청 중 : ???

박근혜 : 잘 모르시는 듯 하니까 어쩌구...

국회의원은 물론 조심해서 뽑아야 하지만 코털은 조심해서 살살 뽑으면 아파서 못 뽑는다.

나는 이 기사를 보고 대단한 불안을 느꼈다.

우선 그 시점에서 내가 보기에 박근혜는 이미 싫건 좋건 미래의 대통령이었다. 문제는 본인의 사고구조가 너무 비정상적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위 대목은 일견 사소한 해프닝처럼 보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내가 생각하는 것은 무조건 옳다. 내 의도대로 반응하지 않는 것은 이 사람들이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구조가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천동설식 사고>라고 칭했다.

천동설식 사고야 말로 그녀의 아버지를 비롯해서 과거 기라성같을 독재자들의 제 1의 덕목 아니던가?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의 상황은 나에게 별로 새로울 것은 없었다. 내 편은 선이고 네 편은 악이라는 이분법적 진영논리의 광기는 이 사회가 수많은 희생으로 이룩한 <절차적 민주주의>의 근간을 좀먹고, 개별 구성원들의 자유로운 창의력 역시 진영논리의 광기가 풍기는 폭력의 향기가 강요하는 자기검열로 인해 오염되어 사회 활력을 뿌리째 자르고 있다.

이런 기막힌 현실이 불러오는 가장 큰 해악은 <가치전도현상>이다.

우리의 바람직한 미래를 담보하기 위한 지향점을 어떻게 설정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어떤 가치들을 추구해야 하는가?

이런 담론들 조차도 진영논리라는 블랙홀로 침잠되는 것이 현실이다.

보수, 진보는 원래 공동체의 바람직한 미래를 담보하기 위한 수단들이어야 한다. 보수진영을 선호하느냐 진보진영을 선호하느냐는 좋흔 사회를 이루기 위한 수단들이며 선택의 문제이고 바람직한 사회, 좋은 사회는 당연히 우리가 지향하는 목적이다.

현재 이 사회는 수단이라는 괴물이 목적을 죽이고 있다.


2015년에 나는 포항에 있었다. 유승민이라는 새누리당 국회의원의 원내대표 연설을 들었다.

내가 보기에 새누리당 의원중 수단과 목적을 구분하는, 다시 말하면 <가치전도현상>에 매몰되지 않은 첫번쩨 인물이었다.(그 이후 더러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시대정신>을 지향하고 있었다.


87년채제 이후 새누리당이 우리에게 제시한 것은 허상이었다. 대중의 허영심을 자극하고, 실정은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며 증오를 선동하고, 마지막에 정권의 임기말에는 권력자의 탓으로 돌리고 꼬리자르기로 유체이탈 하며 권력자와 가장 대척점에 있던 인물을 통해 정권을 재창출 해 왔다.

유승민은 그 용도에 가장 극적으로 적합한 인물이다. 물론 우리 사회 구성원 다수가 그런 술레잡기를 선호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내가 보기에 이 사회는 위선과 기만을 선호하는 거대한 가면무도회장이다.

어떻든 유승민은 이런 술레잡기 사이클에 가장 극적으로 들어맞는 인물이다. 그리고 박근혜이기 때문에 확률 100%로 이 술레잡기는 완성될 것이다.

박근혜 본인은 유승민을 핍박할 것이나 의도와는 달리 그것이 이 거대한 술레잡기 놀이를 성공시키는 키가 되리라는 것을 본인은 영원히 모르리라.

나는 포항에서 주변인들, 그리고 가끔 서울에서 만나는 지인들에게 그것을 말했다.(해맑은 아찌와는 술내기가 걸려있다)


내가 야당 지지자였다가 여당지지자로 바뀌었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나 개인의 지지와 상관 없이 그렇게 예상할 따름이다.

다만 유승민이 시대정신에 천착하는 인물인 것은 사실이다. 이럴 경우 변화시켜야 할 이 광기의 사회에서 그가 차기 권력자가 될 경우에 야당으로의 정권교체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한가지만 언급하고자 한다.

변화에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따라서 에너지가 공급되어야 한다.다만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필요한 에너지의 효율은 달라진다.

에너지투입의 효과는 에너지 공급이 필요한 곳과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것은 자연법칙이다.

조명도는 광원과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며 청평의 균형점도 그와 같으며 우리가 접하는 모든 자연현상은 이 법칙의 범위에 있다.

지구가 태양과의 거리가 지금보다 절반으로 가까워지면 4배의 에너지를 받을 것이며 지금보다 두배가 멀어지면 1/4의 에너지를 받을 것이며 세배가 멀어지면 1/9의 에너지를 받을 것이다.

인간집단의 사회현상도 궁극적으로는 자연의 일부이므로 이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이 사회의 변화의 요점은 간단하다. 갑과 을에서 갑이 변하면 모든 것이 쉽게 변한다.

87년 6월을 돌이켜 보자. 그 이전까지 무수한 피와 땀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정권은 변하지 않았고 영원히 그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해 6월 이후로 상전벽해가 되었다. 전두환이 마음을 바꿨기 때문이다.(물론 무수한 희생의 댓가로 변혁에너지가 임계점에 이르러 강제로 바뀐 것이다) 어떻는 갑이 바뀌면 모든 것이 쉽게 바뀌는 것은 맞다.

유승민은 갑 출신이고 현재도 그 범위에 있다.

을이 바꾸려면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어도 갑의 저항을 수반하기에 생각보다 많이 바꿀 수 없다.(노무현 같은 경우이다)


모든 사회현상은 예외 없이 표리의 양면을 가진다.

조변석개라고, 현상은 한편으로 천변만화 하는 듯 보이지만(혹은 반대로 영원히 변하지 않을 듯 하기도 하지만) 그 이면은 역시 우리가 아는 역사적 교훈의 범위 내에 있다.

그 어떤 어지러움도 결국 <건강한 시민의식>이 살아있는 한 바람직한 방향성을 찾게 되리라 믿는다.

이제 해맑은 아찌에게 술을 얻어먹을 가능성이 커졌다고 믿는다. 

P.S 지난 3월 24일쯤(?) 유승민에 관한 글을 올리겠다고 마음먹은 것을 이제야 실행했다.

     우리의 현실과 x,y,z의 3축 함수관계가 있어 조금 쓰다가 임시저장 하곤 했던 10여편의 글은 이제 지워야 할 듯.

P.S 2018년 1월 30일 현재 위 글은 큰 오류를 담고 있어 지우고 싶긴 하지만 오류도 역시 자신의 삶의 일부이므로 보존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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