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형을 추억하다(5)

안데스의꿈 2022. 2. 20. 11:31

14. 영어

형은 전주 서중으로 진학이 확정되었다. 입학일은 3월 5일이었다. 졸업반이 되면 2월달 수업이 없어지므로 입학일까지 상당한 시간이 남는다. 어느날 아버지가 조그만 책을 구해오셨다. <영어 첫걸음>이라는 제목의 영어 입문서였다.

아버지는 입학 전까지 그 책을 끝내야 한다면서 그날(1965년 1월 초)부터 그 책을 교재로 형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나는 처음 보는 영어가 신기해서 옆에서 구경하곤 했다. gentleman같은 단어는 그때 옆에서 주워들어서 기억 한 것이다. 어느날 외출했다가 돌아온 형이 송동헌 형의 이야기를 꺼냈다. 송동헌 형이 형에게 자기는 영어공부를 시작했고 현재 영어단어를 50개정도 안다고 했다 한다. 그 날 이후 좀 지지부진하던 영어 첫걸음의 진도에 가속이 붙었다.

그 과정을 큰형도 유심히 지켜봤던 것 같다. 어느날 우리 형제들만 있을때 큰형이 아버지에 관해 말했던 기억이 있다.

작은형이 영어 단어 철자를 소리내어 외던 중 gentleman의 철자 오류를 듣고 바로잡아 주신 날이다. 큰형 말은 대략<거의 50년(아버지는 1910년대 초에 도일하여 1915~1919년(약간 부정확할 수 있음)까지 동경고등사범에서 공부하셨음)간 사용 안하던 영어단어의 스펠링을 어떻게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다>는 내용이었다.

 

15. 속독

우리 형제간은 책을 빨리 본다. 속독법을 익힌 적은 없지만 책을 빨리 본다. 그것은 아버지 탓이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2학기 등교를 시작한 직후 아버지는 나에게 국어책을 가지고 와서 그날 배운 범위를 읽게 하셨다. 당연히 더듬거릴 수밖에 없다. 그것을 메끄럽게 읽을때까지 아버지 앞에서 몇번이고 읽어야 했다. 그것을 끝내야 다른 일을 할 수 있었다.

읽을 줄 알면 되는데 왜 쓸 데 없는 일(?)을 시키시는지 의문스러워 아버지에게 말씀 드렸는데 답변은 <네 형들도 다 했다>였다. 할 수 없이 그 쓸 데 없는 일은 1학년 2학기 내내 계속되었다. 3학년 이후 친구들과 동화책이나 만화책을 같이 보면서 그 의문이 풀렸다. 나는 단어 단위로 읽는데 비해 그들은 글자단위로 읽기때문에 읽는 속도에 현저한 차이가 났다. 그렇게 길러진 속독능력은 형이 생전에 남긴 그 방대한 연구업적에도 일정부분 기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속독능력은 무협지를 읽는데도 유용한 능력이다. 형은 중학교 2학년 이후 무협지를 자주 읽었다.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때 집에 오면 큰형에게 와룡생과 사마령의 최신 번역판 무협지를 이야기로 들려주곤 했다. 나중에 나도 읽긴 했지만 와룡생의 정협지, 군협지, 천애기, 비검송, 무명소, 비룡, 비연 등, 그리고 사마령의 검신, 검웅 등이다.

 

16. 바둑책

작은형이 중학교에 진학하던 해 큰형도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집을 떠나고 집에는 나 혼자 남았다. 집안에 형들이 없이 혼자 남게되자 공허감과 약간의 방황이 있었던 것 같다. 가끔 형들이 쓰던 방을 둘러보곤 했다. 방 안에는 형들이 두던 바둑판이 있었다. 우리집은 몇종류의 신문을 구독했었다. 신문에 보면 바둑판이 있고, 바둑돌 일부에 숫자표시가 되어있었다(기보). 신문 기보를 펴들고 혼자 바둑판 위에 돌을 놓으며 해설을 열심히 읽었다. 하지만 해설에 사용되는 용어가 생소해서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국어사전을 꺼내 뒤적여서 설명을 읽어도, 그 설명도 국민학교 2학년의 수준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돌을 놓아가며 해설을 읽기를 반복하자 바둑돌이 놓인 형태와 해설간의 관련성을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했다.

방학때 형들이 돌아오면 문간방을 사용했다. 형들 방이다. 형들이 돌아온 당일 혹은 그 다음날 형들 방에 갔다(나는 안방에서 생활했다) 책상에 놓인 책들 중에 어느 책 한권이 눈에 들어왔다. 책의 제목이<바둑의 비결>이었다.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책을 집어들고 안방으로 와서 책을 읽었다. 사까다의 바둑시리즈 중 <맥>에 관한 책이었다. 너무 흥미로워 자주 읽다보니 저절로 100% 암기가 되었다. 실전에서 비슷한 형태가 나오면 응용을 할 수 있었다. 그 책이 누구 책이었는지 확인하진 않았지만 작은형 책일 것이라고 거의 확신한다. 하지만 형은 그 책을 찾지 않았다. 당시 나는 그 책을 몰레 숨겼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가 열심히 읽는 것을 알고 찾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 책은 내가 바둑의고수가 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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