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형을 추억하다(6)

안데스의꿈 2022. 2. 20. 16:55

17. 세계관

1970년대 초반 겨울방학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유신 전이었던 것은 틀림 없으므로 70년 12월 ~ 1972년 1월 사이였을 것이다. 어느날 저녁 형이 라디오 다이얼을 정성스럽게 맞추고 있었다. 나는 뭔지 모르지만 기대를 갖고 지켜보았다. 형은 cbs 라디오방송(이리지국이 있었음)에 다이얼을 맞추었다. cbs 교양강좌였다. 어느 순간 진한 경상도 사투리의 강연이 흘러나왔다. 강사는 서울대학교 한완상 교수라고 소개했다. 내용은 불의에 침묵하는 비겁한 지식인에 대한 비판이었다. 강의에서는 그것을 불의에 눈을 감는다고 표현했다. 이후 게그식 표현으로 <안개지수>란 표현을 사용했다. 그것을 지금 보면 두가지로 해석 할 수 있는데 안개(眼開)지수라는 의미라면 안개지수가 높은 지식인이라야 바른 지식인이라는 의미겠고, 안(no)개(開)지수라는 의미라면 안개지수가 낮아야만 바른 지식인이라는 의미일 건데 어느쪽이었는지 까지는 기억에 없다. 추측하자면 후자쪽이었던 것 같다. 안개지수라는 말 뒤에 청중들의 웃음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전자였다면 웃음까지 나올만 한 표현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강연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훗날 형의 말을 듣고 한완상선생의 <지식인과 허위의식>을 구했을때의 기쁨은 지금도 또렷하다.

 

형은 고교시절 유신이 선포되기 전에도 박정권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것은 나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형의 그런 비판의식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버지의 영향은 분명 아니다. 아버지는 박정권의 공화당이나 야당인 신민당 중의 어느 한쪽에 쏠리지 않았다. 신문도 동아일보가 아닌 조선일보를 주로 보셨다.(그 당시의 조선일보는 지금과 달리 상당히 중도적인 편이었다) 학교의 영향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신흥고등학교 장평화 교장선생님이 교육청의 지시에 잘 안따르는 것으로 상당히 유명했던 것으로 보아 그럴지도 모르겠다.

형과 초등학교,대학교 동창인 이수일형도 작은형과 비슷한 비판의식으로 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훗날 순진한 소년 버려놓았다고 농담을 하곤 했다.

 

P . S : 원래는 몇꼭지정도 쓰려 했지만 쓰다 보니 묻혀있던 기억들이 떠오르곤 해서 기억이 나는 동안은 계속하려 합니  다. 하지만 내일부터 뭔가 준비해서 3월 4일부터 3월 7일 사이에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마치고 계속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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