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34

어둠의 시대 - 윤정권에 대하여(1)

현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의 존재는 대체로 두가지로 그 존재의미를 규정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헌법적 국가기관으로서의 의미다. 이 경우는 헌법과 법률에 의거하여 행정수반, 국가원수로서 제 권력을 행사하는 존재로 규정 할 수 있다. 즉 군림하는 존재이다. 두번째로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리더로서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이 사회가 지향해야 할 비전을 제시하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 정책들을 수립, 추진하여 사회 전체의 바람직한 발전을 기하는데 솔선하는 리더로서의 존재의미다.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은 와 라는 두가지 단어만을 반복했다. 물론 공약집이 있지만 그것은 국민의 힘 캠프에서 이것 저것 짜집기 해서 급조한 것으로 본인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가끔 정책이랍시고 발표 한 적이..

나의 이야기 2022.08.02

우울한 계절의 기억들

1) 2019년 3월 9일 수유리에 갔다. 90년대 중반 이후 20여년만이었던 것 같다. 4.19탑 근처 어느 식당에서 생선구이로 점심식사를 했다. 식사 후 형은 굳이 10만원을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아마 일부러 올라오게 했으니 경비에 쓰라는 의미같았다. 다시 집으로 이동해서 1층의 서재와 몇몇 보수가 필요한 부분에 대하여 기술적 관점에서 조언했다. 2) 2019년 12월 28일 점심약속을 하고 수유리를 방문했다. 형수님은 홍섭이네 부모 부부를 초청했다고 말했다. 홍섭이는 승일이보다 두살쯤 위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승일이가 어릴때 이웃에 살면서 형제간처럼 친하게 지내다 보니 부모들끼리도 이웃사촌으로 지냈던 분들로 나에게도 반가운 분들이었다. 그분들을 모시고 즐거운 점심식사를 했다. 장소는 역시 4.19탑..

나의 이야기 2022.06.08

형을 추억하다(10)-형의 바둑에 관한 몇몇 기억들-2

어릴때 작은형 옆에 있을때가 가장 즐거웠다. 나와의 대화에 친절하게 응해주는 사람은 작은형이 유일했다. 집에 바둑사랑방이 형성된 뒤에는 그 방의 분위기가 좋았다. 그무렵 나는 바둑을 몰랐지만 승패의 결과는 대국자의 국후담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작은형은 거의 이겼다. 형이 이기면 기뻤고 가끔 지면 우울해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작은형의 초등학교 동창인 조학재 형이 정종삼 형과 함께 왔다. 조학재 형은 그 방 단골이었고 정종삼 형은 그날 처음이었다. 작은형과 대국을 시작하는데 서로 백을 양보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형은 거의 백만 잡았었기 때문이다. 대국이 진행되는데 형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졌다. 안방에서 점심식사를 할때도 형은 오지 않았다. 식사 후에도 좀처럼 대국이 끝나지 않자 큰형이 ..

나의 이야기 2022.04.14

형을 추억하다(9)-형의 바둑에 관한 몇몇 기억들-1

기억하기에 내가 국민학교 1학년때인 1964년 여름방학때 우리집에서 형들이 최초로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형들은 전주로 나가기 전에 초보수준의 기력은 있었던 것 같다(이것은 내 기억에는 없고 추측이다) 작은형은 중학교를 전주로 진학한 이후 한병수씨(증산교인)댁 막내아들(밑에 나와 동갑인 한미자라는 여동생이 한명 있었음) 한상민형(당시 3급기력)에게 바둑을 배웠고 여름방학 무렵에는 지금 기준으로 7급정도의 기력에 도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한상민 형이 집에 들렸을때 작은형이 넉점 접바둑을 두었던 기억이 있다. 당시 7급은 기원이 아닌 곳에서는 상당한 수준이었고, 3급은 희귀한 존재였다) 여름방학때 큰형(당시 전주상고 1학년)과 작은형(당시 서중 1학년)이 금산사 집에 모여서 대화중에 바둑이야기가 나왔고, ..

나의 이야기 2022.04.09

형을 추억하다(8)

19. 바둑 형의 바둑실력은 기원급수로 4~5급정도다. 10대 후반에 그 실력에 도달한 후에는 바둑을 자주 두지 않아 평생 그 수준을 유지했다. 나와는 실력이 비슷할때까지는 종종 대국을 했으나 내가 고수가 된 뒤부터는 대국을 잘 안하게 되었다. 8~90년대에 수유리에 가면 형이 가끔 대국을 청해서 몇점 접바둑으로 몇차례 대국을 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대국을 안하게 되었다. 나는 형이 학문에 전념하면서 바둑에 대한 흥미가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얼마 전 형의 글에서, 연구하다가 휴식할때 바둑TV를 시청했다는 언급을 보고 그게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중급의 애기가가 바둑에 흥미를 잃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도 무심했던 것이다. 나는 고수가 된 뒤에는 점차 바둑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더..

나의 이야기 2022.03.15

형을 추억하다(7)

18. 거인 풀바니안 초등학교 3학년 겨울방학쯤으로 기억된다. 같은반 동네 친구중 누군가가 이란 만화책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 만화 대본점용이 아니고 정식 출판되어 서점에서 팔림직한 책이었다. 미국 원주민 설화에서 유래된 미국 원작의 만화를 국내용으로 이란 만화가가 각색해서 그린 작품이었다. 미국 원주민에게 전해진 거인설화라 내용이 무척 황당무계 했다(거기다가 신동헌 화백의 과장도 첨가되었음직 하다). 그 친구가 보는 것을 틈틈이 어깨너머로 보긴 했지만 그 전체를 보고싶었다. 책을 빌려달라고 했지만 절대 빌려주지 않았다. 어느날 집에 아버지를 찾아온 손님에게 인사를 드렸는데 용돈을 주셨다. 그 친구에게 10원인가를 주고 드디어 그날 해질녁까지 돌려주기로 하고 빌려서 집으로 가져왔다. 책을 다 읽고 작은형..

나의 이야기 2022.03.15

역사학과 사회학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역사학에서 을 어떻데 볼 것인가에 관한 논쟁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영석 삶으로서의 역사 p194-16 ~ p195-17) 여기서 중요한 것을 한가지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현재의 시점에서 현 사회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객관적 "실재"를 정확히 알고 있는가이다. 현재의 일이라면 사료의 부족을 걱정 할 필요도 없고 적시성과 근접성에 대한 문제도 역사학자들의 어려움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난 3월 9일의 대선에 관하여 객관적 "실재"를 공유하고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이 대선에 대한 객관적 "실재"에 근접한 결론은 오히려 몇년 혹은 몇십년 후에 내려질 것이다.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은 현재의 시점에서 가장 객관적으로 판단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이야기 2022.03.12

형을 추억하다(6)

17. 세계관 1970년대 초반 겨울방학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유신 전이었던 것은 틀림 없으므로 70년 12월 ~ 1972년 1월 사이였을 것이다. 어느날 저녁 형이 라디오 다이얼을 정성스럽게 맞추고 있었다. 나는 뭔지 모르지만 기대를 갖고 지켜보았다. 형은 cbs 라디오방송(이리지국이 있었음)에 다이얼을 맞추었다. cbs 교양강좌였다. 어느 순간 진한 경상도 사투리의 강연이 흘러나왔다. 강사는 서울대학교 한완상 교수라고 소개했다. 내용은 불의에 침묵하는 비겁한 지식인에 대한 비판이었다. 강의에서는 그것을 불의에 눈을 감는다고 표현했다. 이후 게그식 표현으로 란 표현을 사용했다. 그것을 지금 보면 두가지로 해석 할 수 있는데 안개(眼開)지수라는 의미라면 안개지수가 높은 지식인이라야 바른 지식인이라..

나의 이야기 2022.02.20

형을 추억하다(5)

14. 영어 형은 전주 서중으로 진학이 확정되었다. 입학일은 3월 5일이었다. 졸업반이 되면 2월달 수업이 없어지므로 입학일까지 상당한 시간이 남는다. 어느날 아버지가 조그만 책을 구해오셨다. 이라는 제목의 영어 입문서였다. 아버지는 입학 전까지 그 책을 끝내야 한다면서 그날(1965년 1월 초)부터 그 책을 교재로 형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나는 처음 보는 영어가 신기해서 옆에서 구경하곤 했다. gentleman같은 단어는 그때 옆에서 주워들어서 기억 한 것이다. 어느날 외출했다가 돌아온 형이 송동헌 형의 이야기를 꺼냈다. 송동헌 형이 형에게 자기는 영어공부를 시작했고 현재 영어단어를 50개정도 안다고 했다 한다. 그 날 이후 좀 지지부진하던 영어 첫걸음의 진도에 가속이 붙었다. 그 과정을 큰형도 유심히..

나의 이야기 2022.02.20

형을 추억하다(5)

14. 영어 형은 전주 서중으로 진학이 확정되었다. 입학일은 3월 5일이었다. 졸업반이 되면 2월달 수업이 없어지므로 입학일까지 상당한 시간이 남는다. 어느날 아버지가 조그만 책을 구해오셨다. 이라는 제목의 영어 입문서였다. 아버지는 입학 전까지 그 책을 끝내야 한다면서 그날(1965년 1월 초)부터 그 책을 교재로 형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나는 처음 보는 영어가 신기해서 옆에서 구경하곤 했다. gentleman같은 단어는 그때 옆에서 주워들어서 기억 한 것이다. 어느날 외출했다가 돌아온 형이 송동헌 형의 이야기를 꺼냈다. 송동헌 형이 형에게 자기는 영어공부를 시작했고 현재 영어단어를 50개정도 안다고 했다 한다. 그 날 이후 좀 지지부진하던 영어 첫걸음의 진도에 가속이 붙었다. 그 과정을 큰형도 유심히..

나의 이야기 2022.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