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역사학과 사회학

안데스의꿈 2022. 3. 12. 10:59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역사학에서 <진실>을 어떻데 볼 것인가에 관한 논쟁이 있었던 모양이다.

<역사연구란 결국 현재와 과거 사이의 대화다. 역사가는 현재 자신의 주관적 편견과 자신의 시대상황의 영향을 받으며 연구대상인 "특정한 과거"를 탐사한다. 즉 특정한 과거에 대해 이전의 역사가가 가졌던 것과 다른 시각과 문제의식을 가지고 접근한다. 따라서 동일한 과거도 다른 역사가에 의해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 사실에서 객관성의 문제는 어떻게 되는가. 카에 따르면,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 "실재"의 투명한 반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객관성은 역사가가 현재의 문제의식에 의거하여 과거의 사실들로부터 그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형성될 수 있다고 보았다. 역사가가 새로운 문제의식과 새로운 시각으로 경험적 실증적 방법에 충실해 과거의 사료에 접근하는 한, 그것은 객관성에서 멀어졌다고 할 수 없다. 객관성에 절대적으로 이를 수 없더라도 역사가는 그 방향으로 자신의 연구를 계속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극단적 상대주의에 빠지지 않으려는 주의깊은 절충론에 가깝지만 나는 그런 정도로 역사적 사실과 객관적 "실재"의 불분명한 관계를 덮어두고자 했다. 김덕호선생 또한 이 같은 논지에 동의했다. 반면, 김재순 선생은 오히려 제프리 엘튼Geoffrey Elton이 "역사학의 실제The Practice of History 1967"에서 주장한 견해를 따랐다. 역사적 사실은 객관적인 것이다. 아직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사료의 한계, 연구역량의 부족때문이다. 그러한 조건이 충족되면 언젠가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이영석 삶으로서의 역사 p194-16 ~ p195-17)

 

여기서 중요한 것을 한가지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현재의 시점에서 현 사회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객관적 "실재"를 정확히 알고 있는가이다. 현재의 일이라면 사료의 부족을 걱정 할 필요도 없고 적시성과 근접성에 대한 문제도 역사학자들의 어려움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난 3월 9일의 대선에 관하여 객관적 "실재"를 공유하고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이 대선에 대한 객관적 "실재"에 근접한 결론은 오히려 몇년 혹은 몇십년 후에 내려질 것이다.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은 현재의 시점에서 가장 객관적으로 판단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참 후에 더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현재의 모든 현상들은 현 순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인과적 변화과정에서 현순간의 단면적 모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건과 관련된 현상들의 현재적 단면의 집합만으로 현재적 사건의 객관적 "실재"를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사건과 관련된 현상들의 인과적 과정이 함께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나는 "현실"에 관심이 많았다. 유신시대와 전두환시대의 압제는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작용했다. 87년 이후 관심이 멀어졌다가 노무현의 죽음 이후 다시 현실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아마 내가 좀 부지런했다면 사회학을 공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사회학은 그만큼 나에게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현재의 사회학이 불완전한 학문분야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역사학과 사회학을 건축용어로 표현한다면, 역사학은 사회를 종단면으로 연구하는 학문이고 사회학은 사회를 횡단면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대한 문제가 생긴다. 사회학의 연구대상들인 "현재의 상황요인"들을 "인과적 요인"에 대한 진지한 고찰 없이는 현 사회현상의 본질을 논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사회학은 역사학의 "최 현대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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