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이야기

융합, 건축, 도시.

안데스의꿈 2017. 1. 2. 20:10

우리 사회에서 건축은 어느 위치에 존재하는가?

이 허황할 듯 한 물음에 대하여 종종 가졌던 상념의 조각들을 떠오르는 대로 두서 없이 나열하고자 한다.

 

의,식,주는 인간 생존의 3요소라 할 수 있었다.

그 시간적 범위는 선사시대까지 이를 것임에 틀림 없다. 다만, 선사시대의 인간은 위 세가지 요소가 생존의 필요 충분조건이었겠지만. 다시 말하면 생존=생활이었겠지만 인간능력의 진보,발전과 함께 다양한 욕구와 융합하여 복잡한 형태로 진화해 왔다.

따라서 현대 문명사회에 이르러서는 이 세가지 요소가 각기 수십 수백가지의 분야, 계통으로 각기의 전문 영역을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가령 건축만 해도 용도에 따라 주거용 건축(그 중에서도 공동주택,단독주택), 업무용 건축(이것도 이십여가지로 나눌 수 있다). 위치에 따라 도시형 건축, 농촌형 건축, 등...

또한 건축은 여러 전문 영역의 협력으로 이루어진다,

건축물의 안전성과 내구성을 담보하기 위해 지질, 구조전문가가 필요하고, 용도에 맞는 효용을 극대화 하기 위한 설계 전문가, 양질의 품질을 담보하는 시공전문가. 거기에 그 요구를 충족하는 무수한 기능인들의 땀으로 완공된다.

 

인간사회의 진화는 도시문명을 낳았다. 도시가 먼저인지 사회 진화가 먼저인지의 논쟁은 불필요하다.

산업혁명 이후 산업사회에 접어들어 도시의 대형화가 초래되었고, 다양한 도시문제가 야기되었다.

도시도 사회 변화와 함께 도시마다, 심지어 같은 도시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영고성쇠의 부침을 겪는다.

이 복잡한 문제 전체를 논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으므로(대단히 방대한 과제이다.) 단 한가지 문제만 짚고자 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사는 도시의 당국자들은 도시의 각 지역마다 특색에 따라 개발하고 활력을 제고하려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을 면밀히 관찰하면 기묘한 아이러니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우선 특정한 목적으로 특정지역에 예산을 투입해서 목적에 맞는 효과를 얻는 경우는 의외로 많지 않다.

오히려 개발계획을 세웠지만 예산배분의 우선순위에 밀려 뭉그적거리던 곳이 저절로 (희망하던 방향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다.

특정한 목적으로 예산을 투입했으나 전혀 예상 밖의 방향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으며, 예산을 쏟아부어도 전혀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예산만 낭비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심지어 전혀 아무런 계획도 없던 곳이 저절로 특정한 방향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좀 엉뚱한 방향에서 언급하고자 한다.

요즘 사회과학 중 가장 어려움을 겪는 분야는 경제학이라고 한다.

그들은 인간사회의 모든 경제현상을 수리적 모형이나 방정식으로 설명하고 풀어내고자 했다.

그 전제조건은 <모든 인간의 경제활동은 경제성과 합리적 이익을 추구한다>는 절대적 명제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것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또 하나, 고전경제학에서 생산의 3요소를 자연, 노동, 자본으로 규정했지만 현대 디지털시대에 이르러 <정보의 실시간 공유와 확산>이라는 요소가 앞의 생산 3요소 전체보다 다 비중이 클 수 있는 상황이 도래하고 있다.

 

<경제지리학>은 이런 와중에 일부 엘리트 경제학자들이 새롭게 암중모색하는 개념 중의 하나라고 한다.

사회의 경제현상을 기존 경제학적 이론으로만 파악할 수 없다는 현실을 절감한 이후의 암중모색의 산물인 것이다.

 

전문 분야라 함은 인간이 <전문적 능력 공급자> 입장에서 나눈 것일 뿐 보통의 인간들(전문가도 자기 분야 외에는 보통 인간이다)은 전문 영역의 경계와 전혀 상관 없이 움직인다. (이것은 당연히 참인 명제일 것이다.)

 

건설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것은 그들이 너무 공학적이고 기능적 사고의 틀에 갇혀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회현상은 표리의 양면을 가진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함께 볼 수 없다. 동전의 양면을 동시에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다만 탐색은 가능하다. 동전의 한쪽 면을 보면서 손가락으로 반대편을 만지면 동시탐색이라 할 것이다.

 

요즘 누구나 떠드는 <융합>의 출발은 이와 같아야 할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