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두개의 세계

안데스의꿈 2021. 8. 27. 11:06

세월호 비극 이후 매일 몇몇 토론방을 순회하며 상당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어느날 한 토론방에서 누군가가 올린 두장의 사진을 보았다. 검은 한복차림의 중년 여성 학부모가 죽은 자식을 확인하고  구슬프게 통곡하는 사진 한장, 그리고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시위하던 시민들이 경찰에 연행되는 사진이었다. 중,고시절 읽었던 데미안에 나오는 <두개의 세계>를 떠올렸다.

 

지배층와 피지배층, 부유층과 빈곤층,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인간세상에는 두개의 세계가 있다. 아니, 인간세상은 두개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앞의 문장은 부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다. 지배자의 세계와 피지배자의 세계, 부자의 세계와 빈자의 세계, 상부구조의 세계와 하부구조의 세계, 이런 표현이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그 표현을 더 구체화 한다면 지배층 네트워크와 피지배층 네트워크, 부유층 네트워크와 빈곤층 네트워크, 상부구조 네트워크와 하부구조 네트워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한다면 인간세상은 대척점에 두개의 네트워크가 있고 중간층에 속한 네트워크가 있긴 하지만 결국 시대상황(변화 혹은 고착)은 대척점에 있는 두개의 네트워크의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양단의 네트워크중 하나가 시대상황에 대한 주적변인이고 중간층은 종적변인이라는 것이다.(중간층이 주적변인이 되는 상황도 있을 것이다. 서양사에 가끔 나타나는 반동의 시대가 여기에 해당 될 듯) 

그렇다면 양단의 네트워크(혹은 중간층) 중 어느 네트워크가 어떻게 주적변인이 되는가?

그것은 상황변인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상황변인이 대척점에 있는 어느 한쪽 네트워크와 결합하고 여기에 중간층이 합류하여 정치권력이 창출되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상황변인이 뚜렷한 변화의 방향성을 가질때 탄생하는 것이 <시대정신>일 것이다.

 

2014년 세월호 이후 앞에서 말한 두개의 세계를 떠올렸을때 세상이 온통 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절망이었다.그런 절망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토론방에 매일 출근했던 것은 거기서 그나마 <사람>간의 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토론방에 가끔 들어오는 <수꼴>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여기는 인간이 대화하는 곳입니다.>

역설적으로 지금의 수꼴들의 마음상태와 그 당시 나의 마음상태가 일정부분 닮은 점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한다.

 

지난 10여년간의 세계적인 우경화 경향은 역설적으로 진보적 시대정신을 낳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조국사태 다음에 치뤄진 총선은 승산이 없는 조건이었지만, 외신이 변수가 되어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 결과이다. 승인은 내부요인이 아닌 외부요인이었던 것이다.(물론 K방역의 성과가 직접적인 원인이지만 국내언론은 묻어버렸고 외신이 그것을 평가 한 것이다). 이번 대선도 국내적 구도만으로는 승산이 적다고 생각한다.(대부분의 언론과 국민의 힘이 동일체이므로). 하지만 외부요인이 상황변인으로 작용하여 승리하리라 확신한다.

그리고 답답할때마다 2016년 절망의 여름을 떠올린다. 절망의 여름 다음의 황금빛 가을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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