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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다시 읽기 11

안데스의꿈 2016. 1. 28. 12:13

4. "참주"와 "군주"

"참주"라는 말은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개념이다. 종종 "전제군주" 또는 "폭군"이라는 단어와 혼용되기도 하는데, 그 기원을 면밀히 살펴보면 이들은 다른 말이다.
한 사람이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참주"(tyrannos)는 "폭군"(despotes)과 다를 한가지 특징이 있다.
바로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후자에게는 필요치 않는은 "인민의 지지"가 있다는 점이다. 폭군이 신민을 노예처럼 다루는 왕을 의미한다면, 참주는 시민의 자유를 지켜주겠다는 명목으로 권력을 잡은 후에 오히려 시민을 탄압하는 인민의 "우두머리"를 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 정치학에서는 "폭군"의 이야기를 통해서는 군주가 귀담아 들어야 할 성찰적 지혜를 많이 전달하고, "참주"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이 새겨들어야 할 정치적 사려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동일한 맥락에서, 서양 정치철학에서 정치 지도자에 대한 교육은 두가지 방향에서 전개되었다.
하나는 왕위를 계승하거나 이미 권좌에 앉은 군주를 훈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능력으로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거나 혹은 그렇게 권력을 획득한 참주를 가르치는 것이다. 전자는 이미 어느 정도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한 왕정(basileia)을 대상으로 한 경우로, 가끔 군주의 덕성을 함양하기 위한 조언이나 좋은 정치가 무엇인지를 전하는 "군주의 거울"(speculum principis)이라는 갈래로 구체화되었다. 후자는 소크라테스가 참주가 되고자 마음먹은 아테네의 젊은이들에게 "좋은 삶"(eu zen)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듯, 미래에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 또는 타인을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진 인물에게 탁월함이 무엇으로부터 획득되는지를 가르치는 정치철학적 교육(paideia)으로 발전되었다.
비록 마키아벨리의 <군주>는 이미 권좌에 앉은 군주에게 바쳐졌지만, 특이하게도 "잠재적 참주" 또는 "권력을 쟁취하려는 인물"을 설득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군주>의 헌정사(Dedica)의 태도가 매우 오만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군주에게 훈계를 받는다는 느낌을 주지 않으려고 글의 절반을 군주에 대한 칭찬으로 채우던 시절이다. 그러나 "통상"(sogliono)과 "복종"(servitu)이라는 단어가 형식적으로 언급된 것을 제외하고, 그는 다분히 수평적 관계에서 군주의 본질과 새로운 전망을 쓰겠다고 이야기한다. 게다가 <군주> 15장에서는 "이해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쓸모가 있는 것"을 쓰려 했다는 소신까지 밝힌다.
22장에서는 자기 설명을 듣고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쓸모없는"(inutile) 두뇌의 소유자라고 단언했을 정도다.
이렇듯 그가 자신의 구직이 실패할 것을 개의치 않았거나, <군주>를 쓰면서도 <강론>의 헌정사에서 밝힌 "왕국(regnum)을 제외하고는 왕이 되는 데 부족한 것이 없는" 잠재적 참주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증거들은 수없이 많다. <계속>

P.S 위 글은 2013년 6월 15일 경향신문 23면 <마키아벨리 다시 읽기>시리즈 4회 도입부이며 필자는 <곽준혁 숭실대 가치와 윤리 연구소장>님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