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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다시 읽기 13

안데스의꿈 2016. 1. 30. 23:05

<마키아벨리의 참주교육... 철학적 절제보다 청치적 성공>

마키아벨리는 소크라테스적 참주교육을 반신반의 했다.그가 생각했을때, 소크라테스적 전통은 두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정치적 "열정"을 철학적 "절제"로 숨죽이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다는 것,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권력을 잡은 "잠재적 참주"가 외세로부터 공동체를 지켜낼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었다. (저도 마키아벨리 쪽입니다. 전자는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철학자"에 의한 "훈육"이 가능한 존재라는 가정 위에 성립하는데 이건 그들의 오만이죠. 저는 이런 사고야말로 전체주의의 원류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옮긴이 생각.) "열정"이라는 정치적 감성을 찾아냉 것은 좋았지만, 그리고 이러한 감성을 이용해서 참주를 가르치려고 의도한 건 좋았지만, 정치공동체의 "수호자"가 되도록 유도하기 위해 잠재적 참주에게 "좋은 삶"을 가르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사실 마키아벨리는 철학적 절제가 없는 정치적 성공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도덕"이 아니라 "영광"(gloria)으로, "절제"가 아니라 "공포"(paura)로 잠재적 참주를 가르쳐야 한다고 믿었다.
그가 <군주>에서 크세노폰의 이름만을 언급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따르는 사람들을 한 데 묶어 "헛된 상상"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비난했지만, 크세노폰이 다른 도시의 우두머리들과 경쟁하는 것이 진정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위대한 경쟁의 승자(nikon)"가 되는 길이라며 참주를 설득한 것에 주목했다.
"영광"을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를 통해 참주가 공동체의 방어에 헌신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군주> 19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5권 11장의 내용이 언급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마키아밸리는 "공포"라는 설득 기제를 부각시킨다.
참주가 스스로를 보존하는 길은 "참주라기보다 신민의 종복"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충고로부터, 그는"절제"가 아니라 "공포"가 잠재적 참주를 신민을 위해 헌신하도록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군주는 결코 귀족의 음모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경고, 그러기에 인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죽을 수 있다는 충고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키아벨리의 정치적 현실주의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성찰로부터 이탈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떤 정치철학도 "공동체"를 지키지 못한다면 무익>

"자연인"의 욕구, 즉 "영광"과 "공포"에 초점을 둔 마키아벨리의 참주교육은 참으로 거침이 없다. 소크라테스 이후 지속된 "올바른 삶"의 기준들이 한꺼번에 허물어지고,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다른 나라의 자유를 빼앗는 "제국의 건설"도 용인된다. 그러기에 <강론> 3권 6장에서 "시에나의 참주"(tiranno di Siena)라고 불렀던 판돌포 페트루치도 <군주> 20장에서는 엄연히 "군주"(principe)일 뿐만 아니라 탁월한 용인술을 가진 인물로도 등장한다.
처음 판돌포를 만나고 난 뒤, 진의를 알 수 없는 "미꾸라지 같은놈"이라고 푸념할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인 것이다. 또한 <군주> 6장과 13장에서 "새로운 군주"(nuove principe)로 묘사되는 시라쿠사의 참주 히애론(Hieron)도 마찬가지다. 마키아벨리는 히애론의 잔인한 방법과 기만적 술수를 도덕적 잣대로 평가하지 않는다.
"인민의 지지"를 통해 권력을 획득했다는 것, 자기만의 군대를 확보했다는 것, 그리고 외세로부터 "다수"를 보호했다는 것만 강조한다. 최소한 이 세가지 측면에서 참주와 군주는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마키아벨리의 참주교육은 도덕적 삶의 내용을 닮지 못했기에 소크라테스로부터 내려오는 전통과 단절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도 자신의 저술을 읽는 사람들의 시민적 삶에 대해고민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마키아벨리의 거침없는 참주 교육에도 몇가지 전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시민적 자유"가 보장된 정치공동체의 설립과 유지가 정치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어떤 정치철학이든 외세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없도록 만든다면 무익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마키아벨리는 아가토클레스의탁월한 능력(virtu)을 칭찬하면서도, 멀쩡한 공화정을 전복시킨 그의 행동을 결코 용서할 수 용서할 수 없었다.
그는 다른 경우에도 곧잘 발견되는 정도의 잔인함에 "사악함"(sceleratezza)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분노를 표출한다.
비록 소크라테스적 전통에서는 천박한 생각일 수 밖에 없겠지만, 마키아벨리도 젊고 야심에 찬 청년들이 참주의 길을 선택하지 않고 시민적 자유를 회복하는 데 헌신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P.S 위 글은 2013년 6월 15일 경향신문 23면 <마키아벨리 다시 읽기> 시리즈 4회분의 끝부분이며 필자는 <곽준혁 숭실대 가치와 윤리 연구소장>님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