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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다시 읽기 12

안데스의꿈 2016. 1. 30. 12:26

<소크라테스와 잠재적 참주... 정의로운 정치적 열정>

화려했던 아테네 민주주의가 막을 내리고 있을때,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은, "참주"가 되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좋은 삶"을 설득하고 나섰다.
궁극적으로 이들의 목적은 자기의 욕망에 충실한 "자연인"의 삶이 아니라 "절제"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는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이때 참주는 "자연인"의 삶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인간으로 묘사되었고, 반면 소키라테스로 대표되는 철학자는 자연인의 욕망을 절제함으로서 "탁월함"에 도달하려는 인간으로 그려졌다.
전자가 정치권력의 획득을 목표로 하는 정치적 삶을 추구한다면, 후자는 올바른 삶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철학적 삶을 대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일한 맥락에서, 소크라테스 전통에서 참주는 비이성적이고, 무법적이며, 무절제하고, 신민의 동의와 정당성을 갖지 못한 통치자로 기술되었다.
그렇다면 이렇듯 "좋은 삶"과 거리가 먼 "참주"가 되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이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잠재적 참주들이 가짐 "열정"(thumos)이라는 정치적 감성 때문이다.
열정은 다른사람들을 지배하려는 욕구로 분출되기도 하지만, 잘못된 일을 보고 참지 못하는 정의감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특히 열정이 정의감에서 비롯된정치적 행동으로 표출될 경우, 잠재적 참주는 어떤 정치적 공동체를 지키는 수호자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래서 최초에 "참주"라는 말이 "군주"(monarchos)와 혼용되고, 귀족의 압제를 물리치고자 인민들이 앞세운 지도자를 지칭했다는 사실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그러했듯이, "열정"을 가진 젊은이들이 공동체의 "수호자"(prostarchos)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 정치철학자의 숙제가 된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좋은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정치를 혐오하거나 권력을 잡을 능력이 없고, 그들이 부딪히는 현실은 시민의 동의와적법한 절차 따위는 관심도 없는 참주들의 세상이었으니 말이다.
이런 소크라테스 전통은 르네상스시대까지 이어졌으며, 단테(Alighieri Dante) 이후 "참주교육"은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아울러 군주정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기 시작했다.
<참주정에 대하여>(De Tyranno)를 쓴 살루타티(Coluccio Salutati)가 대표적인 경우다.
이 책에서 살루타티는 카이사르를 로마 공화정의 극심한 혼란을 잠재우려던 "좋은 지도자"라고까지 말한다. 이런 정도까지는 아니었더라도, 외세의 침입과 내부의 혼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군주정을 옹호하는 경우를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젊은시절 크세노폰의<히에론>(Hieron)을 라틴어로 번역한 브루니(Leonardo Bruni)마저도 공적 헌신만 강조하는 고전적 공화주의에 일대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견해를 피력했을 정도다.
그러나 그 누구도 "좋은 삶"으로부터 동떨어진 "올바른 정치"가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철학적 절제와 정치적 성공은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 소크라테스적 전통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계속>

P.S 위 글은 2013년 6월 15일 경향신문 23면 <마키아벨리 다시 읽기>시리즈 4회분의 일부이며 필자는 <곽준혁 숭실대 가치와 윤리연구소장>님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