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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 다시 읽기 21

안데스의꿈 2016. 2. 9. 23:46

<사보나롤라의 정계 입문 : 공화정의 회복과 시민들의 믿음>


피렌체 시민들은 피에로 메디치가 나폴리로 향하는 길을 내어달라는 샤를 8세의 요구에 굴복한 것을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지 않았다.

비록 많은 이탈리아 도시들이 샤를 8세에게 성문을 열어주었지만, 피에로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피렌체에 복속되어있던 항구도시 피사가 독립을 선언한 것이 치명적이었다. 1494년 10월 샤를 8세의 군대가 피사로 진군하자, 피렌체 귀족들은 프랑스파와 교황파로 분열되었고, 피렌체에는 표면적인 반(反)프랑스정책과는 달리 피에로가 샤를 8세와 동맹을 맺었다는 소문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10월 26일 피에로가 샤를 8세의 군영을 찾아갔다가 붙잡혀 항복에 가까운 조건에 동의했을때, 메디치 가문에 대한 피렌체 시민들의 분노는 되돌릴 수 없는 소용돌이가 되기 시작했다.

11월 5일 수천명의 프랑스 국민들이 피렌체로 밀려들어와 부자고 가난한 사람이고 닥치는 대로 약탈하며 행패를 부리자, 피렌체 시민들은 피에로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이게 되었다. 급기야 피렌체의 실질적인 통치체인 시뇨리아(Signoria)는 원로들의 "회합"(pratica)을 소집해서 메디치 독재의 종식을 알렸고, 상원격인 100인 위원회는 피렌체가 공화정을 회복했음을 확인했다. 아울러 사보나롤라를 필두로 한 특사를 샤를 8세에게 파견해 메디치 가문이 취해온 반(反)프랑스정책을 비난하고, 피렌체에서 자행되고 있는 약탈을 멈춰달라는 요구를 전달한다. 이때부터 사보나롤라는 피렌체 정치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되었고, 11월 19일피렌체로 돌아온 피에로 메디치는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의 "인민의 자유"(Popolo e Liberta)라는 구호에 둘러싸여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시민들의 사보나롤라에 대한 믿음은 11월 17일 사를 8세의 피렌체 입성 이후 더 강화된다. 시민들은 샤를 8세를 열열히 환영했지만, 두려운 눈으로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제로 샤를 8세는 시민들보다 메디치가문을 조종하는 것이 더 쉽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피에로의 아내인 알폰시나 오르시니(Alfonsina Orsini)가 왕의 고문관들을 매수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이때 사보나롤라는 피렌체 시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을 성과를 이루어 낸다.

11월 21일 샤를 8세와 피렌체 시민들의 갈등이 극으로 치달을때, 사보나롤라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잊지 말라"는 말로 샤를 8세를 설득해낸 것이다.

피사의 회복, 성체의 복원, 보조금 삭감, 프랑스 군대의 이동 등 피렌체 시민들이 갈급하던 내용들이 모두 담긴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다.


<사보나롤라의 도덕정치와 시민들의 이탈>


11월 28일 샤를 8세가 피렌체를 떠나고, 사보나롤라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손쉽게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사보나롤라의 정치 개혁은 처음부터 어려움에 봉착했다. 그가 약속한 "새로운 예루살렘"은 보편적인 기독교 세계관을 담고 있었던 반면, 피렌체 시민들이 원하던 바는 "시민적 자유"의 회복이라는 피렌체만의 특수한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종교적 회개"를 통한 도덕의 회복이었지만, 시민들이 진정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던 것은 하루하루 먹고 살 "빵"이었다. 따라서 "신이 피렌체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하려 한다"는 설교가 큰 감동을 준 것은 사실이었지만, 시민들이 더 보고싶었던 것은 "피렌체가 더 부유해지고, 더 강해지며, 더 영광스러워질 것"이라는 예언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그러기에 시간이 갈 수록 사보나롤라의 설교는 점점 격렬해지고, 그의 도덕적 가르침에 시민들은 점차 무료해져 갔다. 1494년 12월 사보나롤라가 자신이 주도한 정치개혁을 "신의 작품"이라고 말했을때까지만 하더라도, 새로 만들어진 "인민정부"(governo popolare)를 메디치 가문의 하수인이었다가 사보나롤라의 추종자로 변신한 피에로 카포니(Piero Capponi)와 프란체스코 발로리(Francesco Valori)의 정치적 야심이 빚어낸 결과라고 비난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1495년 알렉산더 6세를 중심으로 샤를 8세에 대항한 동맹이 결성되고, 놀란 프랑스 군대가 나폴리에서 철군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신의 약속은 멀어졌고, 믿었던 프랑스가 도망가자 사보나롤라의 권위도 시민들의 냉정한 평가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냐 "또 다른 참주"냐>


마키아벨리는 <군주> 6장에서 사보나롤라를 두고 (무장한 모든 예언자들(tutti e' profeti armati)은 획득했고, 무장하지 않은 사람들은 파멸당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설득하기란 쉽지만, 설득된 상태를 유지하기란 어렵다"는 말, 더 이상 믿지 않을때 "강제로"(perforza)믿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충고,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모세도 자기를 따르지 않는 이스라엘 사람 삼천명을 도륙했다는 예를 덧붙인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무장하지 않은 예언자"에 대한 이야기는 왜 피렌체 시민들이 더 이상 사보나롤라를 믿지 못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어떤 이유에서 피렌체 시민들이 더 이상 사보나롤라의 통치를 신뢰하지 않았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강론>을 살펴봐야 한다.

마키아벨리는 <강론> 1권 45장에서, 사보나롤라의 몰락은 "통치" 그 자체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힌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사보나롤라의 거듭된 권고로, 의회는 국사범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죄인들에게도 인민에게 호소할 수 있는 권리를 갖도록 하는 법안을 오랜 진통 끝에 통과시킨다. 그러나 이 법이 승인되고 얼마 후 사보나롤라의 정적들이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을때, 그의 수족과 같은 발로리가 이들의 소청 요구를 묵살한 채 사형을 집행해버린다.

이 사건에 대한 사보나롤라의 침묵은 "자기가 만든 법을 자기의 편의대로 어겼다"는 인상을 시민들에게 심어주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키아벨리는 사보나롤라가 몰락한 이유를 인민들의 변덕이 아니라 인민들이 지도자를 신뢰할 수 있는 기반을 지도자 스스로가 파괴한 신중하지 못한 행위에서 찾는다. 사보나롤라의 정치도 파당적 이익의 관철에 불과하다는 체념, 이로부터 사보나롤라의 도덕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증오가 증폭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마키아벨리에게 사보나롤라는 선동으로 집권한 후 인민을 억압한 또 다른 형태의 "참주"였던 것이다.<계속>


P.S 위 글은 2013년 7월 6일 경향신문 23면 <마키아벨리 다시 읽기>시리즈 7회 잔여분이며 필자는 <곽준혁 숭실대 가치와 윤리 연구소장>님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