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과 허위의식.

지식인과 허위의식 조명 6

안데스의꿈 2016. 2. 17. 11:36

2> 이데올로기와 허위의식


"이데올로기"라는 말은 "사회학""의 낱말이 그랬듯이 프랑스에서 만들어졌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가는 때, 형이상학적 철학의 한계를 극복하여 감각으로부터 모든 사상과 관념을 설명하려 했던 경험론적 철학자들이 이데올로기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이다. 곤디약(Condillac)과 그의 제자들이 "ideologue"라는 표현을 사용했었다.그런데 이 말을 부정적인 뜻으로 처음 사용한 사람은 19세기 초 나폴레옹이라고 한다. 드 사드(De Sade)의 인용에 의하면(1812년), 나폴레옹은 "어둠침침한 형이상학"을 곧 이데올로기로 보고 이것을 "역사의 핵심과 교훈에 대한 이해"와 대조시켰다고 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데올로기가 갖는 부정적인 함의이다. 이데올로기를 부정적으로 보는 전통은 그 후 끈질기게 내려오고 있다.

마르크스에 와서 이데올로기의 뜻은 더욱다듬어지게 된다. 그는 이것을 허위의식의 문제로 본다. 즉 환상에 입각한, 오도되고 왜곡된 이념체계로 보고 이것을 이른바 과학적 이론과 대조시킨다. 이 같은 이데올로기는 종교적, 법적, 그리고 정치적 구조의 기득이권을 옹호하고 합리화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같은 구조의 평가에 관한 이론이 되기도 한다. 이른바 하부구조에 의해 결정되는 상부구조의 한 항목인 것이다.

이에 비해서, 과학적 이론은 어떤 계급의 이해관계에 의해 왜곡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 타당한 것이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가 갖는 당파성과 계급성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편파성과 왜곡 가능성은 마르크스주의의 예언이 실현되는 날 없어질 성질의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무계급사회라는 유토피아가 도래하면 마르크스주의는 보편타당한 과학적 이론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오늘날 소련체제에서는(1970년대는 소련 공산제국이 건재하던 브레즈네프 시절임, 옮긴이 주) 이데올로기적 작업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힘쓰고 있다. 이른바 이데올로기 전문가(ideologist)의 역할이 이것의 질을 높여서 보편성을 띠게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독일의 히틀러 정권에서 탈출한 망명 사회학자 만하임에 와서, 이데올로기의 뜻은 더욱 분명해 진다. 그의 명저<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서 그는 이데올로기 연구를 통해 인간의 각종 이익집단이 갖는 굴절되고 위장된 의식을 폭로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그에 의하면 두 가지 이데올로기가 있다. 하나는 부분 이데올로기(particular ideology)로서 개인심리적인 차원에서 나타나는 허위의식이다. 이것은 개인의 거짓말과 비슷한 것이다. 둘째는 전체적 이데올로기(total ideology)로서 인간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에 의해 결정되는 전반적인 허위의식이다. 전체적인 허위 관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는 이데올로기를 유토피아와 구별함으로서 전자의 뜻을 더욱 선명하게 밝혀준다. 이데올로기를 기존체제의 기득이권을 보존, 옹호, 강화시키기 위해서 창출되는 허위의식이라고 한다면, 유토피아는 기존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기 위해 만들어지고 동원되는 왜곡된 사상체계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봉건체제나 앙시앙레짐을 넘어뜨릴 때의 브루주아의 사상은 유토피아적이고, 그 후 이들이 강자층이 되어 기존 질서의 주축이 되면(기득권층이 되면, 옮긴이 생각) 이들의 사상이 이데올로기로 변화된다. 이렇게 볼 때 이데올로기는 체제긍정적인 허위의식인 반면, 유토피아는 체제부정적인 허위의식이다.(저는 이 대목을, "인간의 불완전함에 대한 겸허한 인식"이 바로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자유로움이고, "인간의 완전함을 믿는 만용"이야 말로 이데올로기에로의 "귀의"이라고 이해 했습니다, 옮긴이 주)

이 같은 이데올로기의 성격은 불가피하게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화 내지 일반화하려는 경향을 띠고 있다. 인간사회의 현실태는 대단히 복잡하고 다양하다. 특히 현대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복잡하고 이질적인 현실태의 여러가지 영역을 단일한 이념을 적용하여 단순화시키려는 대서 이데올로기가 나오기 쉽다. 즉 복잡한 현실태를 한두가지 이념을 통해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설명을 하려고 할 때 불가피하게 현실을 왜곡시키게 된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는 제조되는 것이다. 그리고 허위의식이 생기게 되고 체계화 된다. 여류 사회과학자 아렌트(H. Arendt)는 이데올로기의 이같은 성분을 잘 밝혀주고 있다. 즉 허구성, 규범적 성격, 그리고 설명적 성격을 잘 인식하고 있다. 

우리가 이데올로기를 허위의식의 체계로 볼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문제점이 있다.플레이머냇(J. Plamenatz)이 적절히 지적한 대로 이데올로기의 확산도와 포괄도의 문제이다. 확산도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어느 만큼 이것을 함께 가지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문제이다. 즉전체 인구의 몇퍼센트가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이 주로 가지고 있는가를 밝히는 문제이다. 이것은 특정 이데올로기가 어느정도 넓게 전체 인구 속에 퍼져있나 하는 문제이다. 포괄도란 이데올로기가 내포하고 있는 여러 사상이 어느 정도 깊게 인간의 의식 속으로 스며들어 갔는가를 밝히는 문제이다. 가장 포괄적이고 확산된 이데올로기를 우리는 세계관(Weltanschauung)으로 부를 수 있겠다. 이 확산도와 포괄도를 놓고 얼마든지 왈가왈부할 수 있으며 이 왈가왈부 자체가 허위의식을 더욱 조장시킬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이 또는 허위의식이 반드시 계급적 성격을 가지게 되느냐 하는 문제를 이해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데올로기의 계급적 성격을 대단히 중요시한다. 심하게 말하자면 계급의식 없는 곳에 이데올로기는 없다. 이데올로기는 특정 계급(계층 아닌)의 이해관계에 의해 산출되는 허위의식인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입장은 지나치게 독단적인 일면이 있다. 엄격하게 말하여 계급 아닌 집단에 의해서도 이데올로기는 제조될 수 있다. 특히 경제적인 생산수단의 유무와는 관계 없는 집단 사이에서도 이데올로기적 대립은 나타난다. 즉 정치적 이해관계의 상충에서 이데올로기는 더욱더 잘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은 권력의 유무에 따라 이데올로기는 더욱 허위의식을 강하게 지닐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학자 파레토(Pareto)는 이데올로기라는 말 대신 "데리베이션"(derivations)이라는 낱말을 사용한다. 그는 허위의식에 주목하지 않는다. 어떤 정감이나 사상의 진위 여부를 묻지 않고, 또 따져보지도 않고 그 정감이나 사상에 입각한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이것을 사용할때 "데리베이션"이 생긴다고 본다. 파레토에 의하면, 이것은 특정 집단의 이데올로기이다. 이것은 비슷한 욕구와 태도를 가진 사람들을 결속시키고 단결시키는 데 제 1차적 의미가 있지 그 집단의 이익 강화는 부차적이다. 그리고 이 집단은 반드시 마르크스가 말한 계급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파레토는 지배집단을 계급으로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배층 사람들은 반드시 공통된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른바 엘리트 집단은 비 엘리트 집단에 비해 동질성을 띠고 있으나 마르크스가 본 계급의식을 가진 사람의 집단인 계급과 동일시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소렐(Sorel)의 신화(myths)의 개념도 이데올로기와 흡사하다. 신화가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이것이 공통된 정감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신화는 이들의 느낌과 행동의 촉진제가 되고 동시에 이것을 합리화시켜 주기도 한다. 신화도 이것이 진실하기 때문에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마르크스와 달리 그는 혁명을 계급의식에 바탕을 둔 계급이익의 추구때문에 생긴다고 보지 않는다.오히려 자기확인의 행동의 결과로 본다. 이같은 행동은 신화에 의해 촉발되고 합리화된다.

파레토나 소렐은 다른 낱말을 통해 이데올로기적 기능에 대해 언급한다. 그것이 데리베이션이든지 신화이든지 간에 다소의 허위의식을 포함하고 있으며, 특히 그것들이 현실의 특정집단의 행동과 사고를 변명, 설명 및 합리화시켜 준다는 데 공통점이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


P.S 위 글은 한완상 선생의 저서 <지식인과 허위의식>(1993년판 19쪽-22쪽)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