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과 허위의식.

지식인과 허위의식 조명 8

안데스의꿈 2016. 2. 19. 19:48

<지식인과 허위의식  3. 허위의식이 난무하는 구조적 조건들: 이전 글과 연결된 후반부다.>


양극화 이외에 이데올로기가 쉽게 나타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는 정부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일반 시민 특히 지식계층의 가치관이 크게 다른 경우를 빼놓을 수 없다. 만일 정부와 민간이 다 같이 민주주의적 생활양식을 가지고 있다든지, 다 같이 권위주의적 의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문제는 없는 편이다. 그런데 이 양 집단이 각기 다른 정치의식을 강하게지니고 있을때 문제가 있다. 여기에도 두가지 다른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첯쩨는 정부는 대단히 민주적인데 민간측은 전통적인 비민주성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경우를 생각할 때, 이데올로기가 들어갈 가능성은 있으나 이 경우는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이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민주적 의식이 이상(理想)으로 존중되는 조건에서 그렇다.(노무현정부 시절이 이 조건과 유사한데 한가지 "민주적 의식이 이상으로 존중되는 조건"이 부족했던 것이 우리 사회를 오늘에 이르게 한 비극이겠죠. 옮긴이 생각)

둘쩨로, 정부는 권위주의적인데 민간쪽은 대단히 민주주의적이라고 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이 경우, 정부는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권위주의의 능률성을 강조할 가능성이 커진다.그리고 설득력 있을 것 같은 낱말로서 지배의 정당성을 고양시키게 된다.여기에 이데올로기는 재빨리 번식하게 되는 것이다.(딱 현재의 우리사회죠. 옮긴이 생각)

다음에 사회의 안정도와 그에 알맞는 지도자형 사이에간격이 생길때 허위의식이 쉽게 형성된다. 사회 안정도에 따라 우리는 적어도 네가지 다른 지도자형을 생각할 수 있다.

첫쩨, 사회가 지극히 불안할 때에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가 요청된다. 지극히 불안한 정황이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요청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불안을 수습할 수 있는 힘은 특출하고 예외적인 힘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적 수요에 부응하여 나타난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우리는 역사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사회가 극단적으로 불안하지는 않으나 여러가지 구조적 부조리때문에 다소 불안할 때에는 개혁가 및 혁신가형 지도자를 국민은 갈망한다. 수술할 것은 용감히 수술하고, 제도화할 것은 소신껏 제도화하여 현실구조를 신축성 있게 혁신해나가는 사람을 이상적 지도자로 본다.

사회가 다소 안정되어 있기는 하나 불안의 요소를 없애버리지 못한 상황에서는 이른바 위정자(statesman)를 이상적인 지도자로 본다. 특정 정당이나 집단의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대국적 입장에서 지배할 수 있는 정치가를 갈망한다. 이 경우 이른바 폴리티션(politician : 정치꾼)은 금물이다.

사회가 대단히 안정되어 있을때는 합리적인 행정가형이 이상적 지도자가 된다. 객관적으로 타당한 규칙과 절차에 따라 공정히 임무를 수행해 가는, 좋은 의미에서 관료가 요청된다. 일종의 테크노크렛(technocrat)이면 족하다.

그런데 문제는 안정도에 맞지 않는 지도자가 출현할 때 그는 자기의 지도력이 상황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상황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을 자기에게 편리하게 굴절시킨다. 예컨대 상황은 대단히 불안정한데 차분한 행정가형이 나타나면, 그는 그의 지배를 지속시키기 위해 자기 형에 알맞는 안정 상황을 짐짓 부각시킨다. 실제로는 사회가 지극히 불안한데도 불구하고 사회는 안정되어 있다고 역설한다. 사회 불안을 예민하게 느끼는 국민들의 상황판단을 변경 내지 굴절시키려고 한다. 상황에 대한 허위의식을 조장시킨다. 반대로 상황은 그렇게 불안하거나 불안정하지 않은데, 지나치게 강력한 지도력이나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나타나면 불안의식을 조성시킨다. 실제로는 다소 안정되어 있는 상황인데도 짐짓 대단히 불안한 것처럼 선전한다. 국민들로 하여금 위기의식을 가지도록 함으로써 지도자는 자기 개성에 맞게 지배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예에서 뚜렷하게 볼 수 있듯이 지도층은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를 남발하게 된다. 안정을 강조하는 미사여구나 불안정을 자극시키는 "멋진" 낱말들이 춤추게 된다. 굴절되고 왜곡된 현실인식이 퍼지게 된다. 이러한 허위의식은 강자를 더욱 강하게 하는 반면 약자는 더욱 약하게 만든다. 이데올로기에 압사당하는 것은 주로 약자층이다. 물론 아름다운 표현으로 장식된 이데올로기의 창안자들도 멀리 보면 이것때문에 스스로 피해를 입는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원용된 강자의 이데올로기에는 자유, 행복, 평등, 정의, 복지, 평화 등의 아름다운 낱말들이 있다. 자유의 이름 밑에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강자에 의해 착취되고 억눌렸는가는 고전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평등의 미명 아래 수백만의 선량한 시민들이 학살 투옥되었다는 사실을 공산체제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은가?

이 같은 허위의식을 누가 폭로하고 시정해야 할 것인가?

이 역사적 사명을 누가 감당해야 할 것인가?


P.S 위 글은 한완상 선생의 저서 <지식인과 허위의식>(1993년 신판 25쪽 14행-27쪽)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