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과 허위의식.

지식인과 허위의식 조명 10

안데스의꿈 2016. 2. 22. 10:13

<4. 지식인과 허위의식 : 이전 글과 연결된 후반부입니다>


둘쩨, 글을 어렵게 쓴다.굳이 어렵게 씀으로써 현학적 자만심도 채울 수 있기 때문에 보신책과 자만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이중의 효과가 있다. 전문적인, 그리고 전문적인 듯한 난삽한 언어를 종횡무진 사용함으로써 강자의 허위의식의 폭로를 형이상학적 수준으로 올려버린다. 그런데 이 경우,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가진 독자로 하여금 그 어려운 낱말들이 한낱 지식인의 자기보호책에 불과하다는 점을 깨우쳐 줌으로서 지식인에 대한 환멸을 더욱 짙게 한다. 물론 전문 학술지에 실리는 글은 예외이다.

셋쩨, 외국 학자나 지식인의 언어와 업적을 열심히 인용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예기와 비슷한 말을 이미 발표한 외국인을 앞세워서 자기 발언과 비판에 대해서 책임지지 않으려 한다. 구태여 외국학자들의 "보편적"이론과 개념을 부지런히 원용하는 저의는 충분히 이해됨직 하다. 이 방법은 앞에서 지적한 두가지 방식보다는 훨씬 더 핵심을 찌를 수 있다.즉 구조적 부조리와 강자의 허위의 정곡을 좀더 정확하게 찌를 수 있다. 그러나 이 보호책도 비판받을 가능성이 있다. 즉 비 주체적인 사대주의 지식인으로 규탄받기 쉽다. 마치 외래 이론과 개념을 무조건 숭상하여 이것을 직수입하려는 몰지각한 자인 양 낙인 찍히게 된다. 실은 그러한 표현방식이 자구책의 일환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빙자해서 사대주의적 지식인으로 오해하려는 사람들이 나온다.

이상의 세 가지 표현방식은 허위의식을 다소나마 폭로하려는 문제의식이 있는 지식인의 관심사이다. 그리고 이 세가지 방식을 혼용하는 지식인도 적지 않다. 어렵게 쓰면서, 모호하게 표현하고, 그리고 동시에 짐짓 외국 개념과 이론을 많이 쓰는 지식인도 우리 상황에서 적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우리 상황에서 좀더 정직하게 허위의식을 폭로하고 이의 시정을 위해 행동하는 예언자적 지식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들을 제도적으로 격려하고 도울 수 있는 장치가 거의 없다. 이것이 아마도 우리의 가장 심각한 비극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강자의 허위의식의 폭로는 1차적으로는 약자의 권익을 보호 증진하는 것이지만 2차적으로는 강자 자신들의 장기적인 안녕에도 필요하다. 이같은 지식인의 비판적 역할은 반드시 장기적인 시각, 그리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강자의 단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대단히 불쾌한 행동같이 보일지라도 장기적이고 합리적인 안목에서 보면 강자와 약자가 다 같이 이러한 비판으로 혜택을 받게 된다.

나는 허위의식을 창출하고 이것을 비호하며 격려하는 지식인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들이 시시비비(是是非非)를 찬성하는 쪽과 "시"만을 인정하는 쪽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고 볼 때 후자의 경우는 언급의 대상이 되지 않으나 전자의 경우 시시비비의 한계를 지적해 두고자 한다. 시시비비는 강자와 약자가 극한적으로 맞서지 않고 그리고 약자의 비판의 재량이 많이 보장되는 때에만 타당성을 지닌다. 그렇지 않은 경우, 시시비비는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비비"할 가능성이 제도화 되어 있지 않든지 혹은 허용되지 않게 되면 "비"를 아무리 심하게 그리고 자주 한들 "시시"만을 존중하는 풍토에서는 시시비비의 논리가 전제로 하는 "시"와 "비"간의 균형이 이루어지기가 어렵기 때문이다.(이 말은 그 당시 회색지식인들을 일컷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강단에 있을 때는 수위를 조절하며 적당히 비판적이다가 장관자리 하나 주면, 안에 들어가서 고칠 것 고치겠다고 하는 사람들 좀 있었죠. 그래도 지금 보면 그들이 그나마 낫죠. 지금은 아예 모두들 당당하게 "시"만을 말하고 "비"들은 말이 없죠. 비슷한 경우가 노무현때 장마철의 곰팡이처럼 그렇게나 많던 NGO들 지금은 다들 증발했죠. 옮긴이 생각)

그렇다고 오로지 "비"만을 일삼는 것이 비판적 지식인의 임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술한 대로 허위의식과 구조적 부조리에 대해 날카롭게 "비"를 하면서도 더 정당한 의식과 구조에 대한 꿈과 통찰과 구조에 대한 꿈과 통찰과 분석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더욱 인간화된 구조 속에서 자유, 평등, 형제애가 한낱 이데올로기로 전락되지 않는 상황에 대한 열망과 이해가 있어야 한다. 더욱 인간화된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과 이해가 있어야 한다. 스키너(Skinner), 헉슬리(Huxley), 오웰(Orwell)등의 기분나쁜 유토피아가 아닌, 자유와 평등이 절묘하게 균형잡힌 가운데 인간화가 구현되는 그러한 사회에 대한 꿈과 청사진을 개발해야 한다. 역사와 상황성을 초월하는 무장소로서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와 상황 속에서 제도화될 수 있는 그러한 정당한 유토피아를 꿈꾸고 그 청사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건설적인 비판을 하는 지식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허위의식을 폭로한 후 "참"의식에 대한 최소한의 기준을 밝힐 수 있는 지식인이 아쉽다. 정녕 우리 풍토에서 그러한 지식인이 아쉽다. 이러한 지식인은 항상 자기 자신이 무의식적으로나마 허위의식을 만들어 내는데 공헌하지 않나 하는 자기비판과, 자기 의도와는 관계 없이 허위의식을 옹호하지 않나 하는 자성을 끈임없이 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비판을 할 줄 모르는 지식인의 비판정신은 비판받아 마땅하기 때문이다.


P.S 위 글은 한완상 선생의 저서 <지식인과 허위의식>(1993년 신판 30쪽 2행-32쪽)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