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 바르게 보기

마키아벨리 다시 읽기 5

안데스의꿈 2016. 1. 23. 11:45

2> 포르투나 ( fortuna )와 비르투 ( virtu )

" 운칠기삼 " 과 "시대정신 " (Zeitegeist )이라는 말이 있다. 전자는 청나라 포송령이라는 사람의 글에 나오는 말로, 인간사 성공과 실패에는 운이 7할을 좌우하고 노력이 3할을 차지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후자는 헤겔이 <역사철학 강의>에서 언급했듯이, 특정시대에 살고있는 사람들에게는 늘 보편적으로 갈망하는 어떤 정신적인 지향이 있다는 말이다.
얼핏 보면 두 말은 다른 것 같지만, 마키아벨리의 시각에서 보면 똑같은 정치적 태도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바로 운명론 또는 결정론적 시각이 두 단어에 담겨 있다는 것이다. "운이 7할 " 이라는 말을 미래는 불확실하니 열심을 다해야 한다는 충고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하늘의 뜻에 달렸다"는 운명론의 틀을 벗어날 수는 없다. 또한 " 시대정신 " 이라는 말이 시대적 요구를 담아 새로운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는 웅변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미네르바의 올빼미가노을이 질 무렵에야 날갯짓을 시작하듯, 인간의 지혜는 시대적 요청을 먼저 깨달을 수 없다는 결정론적 시각이 내재외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마키아벨리에게서도 이런 모습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로마인 이야기 >로 우리에게 익숙한 시오노 나나미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녀는 마키아벨리가 말한 " 필연성 " ( necessita )을 "시대정신 " 으로 이해한다. 초인간적 "운명 "과 인간의 " 능력 " 이 맞닥뜨리는 지점, 상황과 인물이 맞아떨어진 순간, 그리고 기회의 포착으로 해석한 것이다.
참으로 매력적인 시도지만,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과연 그토록 절박했던 마키아벨리가 적극적으로 상황을 만드는 사람보다 소극적으로 기회를 기다리는 사람을 요구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물론 마키아벨리가 불확실성을 제거하기 위해 "공포 " 와 " 힘 " 에 의존하는 정치철학을 주창했다고 단언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그러나 이런 해석을 통해서는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것이 정치철학의 시작 " 이라는 전제도, " 불확실성 속에서 가능한 한 최선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정치의 본질 " 이라는 조언도 제대로 읽을 수가 없다.
만약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필연성이 그런 의미의 " 시대정신 " 이었다면, 그는 흔해빠진 르네상스 지식인들 중 한사람에 불과했을 것이다. 진정 그러했다면, 그는 당시 지식인들의 운명론적인 넋두리를 결코 극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와 아이러니... "군주론 "도 운명의 장난.

마키아벨리의 삶은 역설 그 자체다.그와 메디치가문의 관계를 살펴보면 더욱 그렇다. 그가 태어난 1469년은 메디치가문의 전성기를 가져온 로렌초 ( Lorenzo il Magnifico )가 권력을 잡은 해고, 그가 죽은 1527년은 1512년 복귀했던 메디치가문이 피렌체의 정치공간으로부터 다시 축출된 해다. 그가 정치 일선에 나서게 된 계기도 메디치가문과 가까운 사람의 추천 덕분이었고, 그의 실직과 추방도 메디치가문 때문이었다. 그의 삶과 메디치가문은 운명적으로 얽혀 있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 군주 " (De Principatibus )도 마찬가지다. 마키아벨리가 붙인 최초의 라틴어 제목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이 제목을 글자 그대로 옮기면 ( Sui Principati )라고 옮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초대 로마황제가 로마 공화정의 후계자임을 밝히기 위해 사용한 " 원로원의 수장 " ( princeps senatus ) 이라는 함의를 함께 갖고 있다. 공화정의 부활을 가장 두려워할 메디치가문의 군주에게, 자기가 꿈꾸는 세상은 로마 공화정이라는 점을 숨기지 않고 밝힌 셈이다. 수사학에 정통했던 그가 어떻게 이런 무모하할 정도의 솔직함으로 권력자의 신임을 받으려 했는지 의아해지는 대목이다.
마키아벨리의 의도가 우리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 것도 운명의 장난이다. 1532년 안토니오 블라도가 교황 클레멘스7세의 허가를 받기 위해 제목으로부터 내용에 이르기까지 대대적인 수정을 가한 후, 최초의 라틴어 제목이 지금의 " 군주 " ( I Princpe )로 바뀌고 만다. 그리고 우리는 일본식 번역을 따라 " 론 " 이라는 글자를 붙였다.
귀치아르디니 (Francesco Guicciardini )dml <회상록> (Ricordi)이 <신군주>라는 이름으로 출판되는 기이한 현상에서 보듯, 우리는 <군주>로부터 " 권력 " 또는 " 처세 " 외에 아무것도 배울 수 없을 것만 같은 선입견을 갖게 된 것이다.
운명이었다면 마키아벨리에게는 너무나 가혹하다. <계속>

P.S 위 글은 2013년 6월 1일 경향신문 23면 <마키아벨리 다시 읽기>시리즈 2회분 일부이며, 필자는 <곽준혁 숭실대 가치와 윤리 연구소장>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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